초등 교사로 가장 빛났던 무안 일로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의도에 따라 1973. 11.15 자 고향 무안군 일로면 면소재지 학교인 일로 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36학급 교직원 수 50여명의 전라남도 내에서도 비교적 큰 학교에 속한다. 무안군 일로 국민학교는 내 인생에 있어서 큰 흔적을 남기게 한 학교였다. 결혼을 하고, 두 자녀까지 얻게 해준 시기가 이 학교이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은 나로서는 안면이 없었지만 아버지 고향 선배인 김 화관 교장선생님이셨다. 역시 고향 학교인데다 이 학교도 젊은 선생님이 많아 금방 적응이 되었고 재철, 래목, 달표, 남준, 문일, 한섭, 윤남, 등 선생님들과는 일광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친구처럼 잘 어울리고 여행도 같이 하는 등 의기투합, 교내외 생활을 즐겁게 하였다.
이 시절 제법 멋있어 보이는 내 모습
목포에서 통근을 하는 관계로 날마다 출퇴근이 같아 어울리는 시간이 더욱 많았으며 퇴근 후에는 학교 앞 식당에서부터 시작하여 목포에 도착해서까지도 거의 날마다 술자리가 만들어졌고 감기라도 오는 날이면 감기를 잡는다는 핑계로 소주잔에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는 등 내 인생 최고 절정기라고나 할까? 객기를 부리던 시기였다.
학교생활도 충실히 하여 소정의 연수과정을 이수하고 76. 02. 28자 초등학교 1급 정교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그 해 군내 과학 공작 실기대회, 교육사진 촬영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인성교육 우수교사로 교육장상을 받기도 하였다.
1077년 1월 15일에는 일반강습으로 전라남도 과학교육을 이수하였고, 그 해 군내 과학 실험 실기대회, 교원 사진 촬영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으며, 실내학습공원화 우수교사 교육장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이 학교에서 비로소 교직사회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눈을 뜨게 되었으니, 이제는 교직 경력도 상당해져서 1급 정교사 강습을 갈 수 있는 대상이 되었고, 당연히 그 해 강습 대상자 명단에 들어있을 것으로 알았는데, 5명 대상자 중 4명은 명단에 들어가고 나만 탈락이었다. 정말 창피하고 화가 치미는데 견딜 수 가 없었다. 학교 탓이 아니건만 교장, 교감 선생님에게 한바탕 따지겠다고 흥분한 나를 나와 인척 관계에 있는 연구부장 선생님께서 그렇게 하면 후회할 것이니, 이번 여름방학 동안 나와 과학 작품을 만들어 상을 타도록 하자고 격려해 주어 꾹 참고 그 해 여름 방학을 반납하고 작품 만드는데 배우면서 협조하였고 그 결과 무안군 대표작이 되었다.
그러나 로비가 없었던 우리의 작품은 전라남도 대회에서 탈락의 고배를 맛보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교직에 있는 나머지 평생을 매년 상을 받고, 연수 활동에 매진하는 성실한 교직생활을 했다고 자부한다. 그 결과 다음 해에는 교내 과학부장이 되었고, 1급 정교사 자격 강습도 가게 되었다. 또한 매년 각종 연수회에 참석하여 실력을 쌓는데 노력했고, 군내는 몰론 도내 각종대회에서 상도 많이 탔으며. 군내 자연과 재교육 강사로 활동하는 등 꽤 실력 있는 교사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앞서 이야기한 전임 학교에서의 연애 사건으로 갈등과 스트레스에 견디기 어려웠던 나는 이의 돌파구로 서예학원에 입문하여 서예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 때 다니던 목포의 서예학원은 무구회로 원장은 서 종견님이었고, 초빙 선생님은 월파 선생님이셨으며, 나중에는 소암회를 조직하여 제주도의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 선생님을 모셔 월 2회 정도의 지도를 받기도 하고, 회원전을 갖는 등 상당히 열심이었다.
참고로 소암 선생님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선생님은 제주도가 낳은 서단의 거장중의 한 분이다. 일찍이 일본에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며 우리나라 서도의 한 경지를 이루신 분이다. 얼마 전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먹고 자고 쓰고’라는 주제로 선생님의 작품 전시회도 열렸었다.
중견 서예가이신 규당 조종숙 선생의 소암 선생님의 예술세계에 대해 쓴 글을 보면 “ 행,초서의 넘어질 듯 거칠고 미칠 듯 분방하게 터지는”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선생은 같은 글에서 “점, 획의 모양이 서로 다르며 그러나 무작정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모양 속에서도 엄격한 법도가 있어 흩어져 있거나 허술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다.” 라고 적었다.
소암 선생님의 작품 중에 ‘필가묵무(筆歌墨舞)라는 구절이 있다.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춘다‘ 라는 의미로 선생님의 예술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의미로운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소암 선생님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 글씨가 어떻게 하면 노래가 될까? 춤이 될까? 결국은 춤과 같이 쓰고 노래와 같이 쓰면 좋겠다.” “아는 사람이 보면, 글자는 가만히 있지만 활동한다... 춤추는 것처럼 한다.... 노래하는 것처럼 한다.” 라고 하셨다.
서귀포시에 가면 소암 기념관이 있어 다소나마 그 분의 예술적 경지를 느껴 볼 수도 있다. 또한 제주도의 돌문화공원 지하 전시실 입구에 보면 ‘수급불류월(水急不流月)’이라는 글씨가 한 눈에 들어온다. ‘물은 급히 흘러가도 물 속의 달은 그대로 있다.’는 뜻인데 ‘세상이 변해가도 내 마음 속 청정함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문다,’ 는 의미쯤으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이 글씨는 소암 선생님의 글씨들에서 집자하여 사용한 것이다.
그 시절 어지럽던 마음을 이렇듯 나는 서예에 열중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서예 활동을 계속하였더라면 지금쯤 대가는 아니더라도 서예가로서 입지가 다져졌을 것을 광주로 전근이 되면서 중단하게 되어, 내 인생에서 지금은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이런 와중에 전임학교에서 나와 연인 관계로 시끄러웠던 선생님은,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떠나갔다. 진도의 허 선생님은 아버지의 배려에 힘입어 1974. 03. 01자 무안군 몽탄면 몽탄 남 국민학교로 전입 되었고, 허 송순 선생님과 드디어 1975년 1월 8일 목포 소재 목포예식장에서 우여곡절의 대미를 장식하는 운명적인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시던 아버지의 덕으로 수많은 축하객이 찾아주어 예식장 개장 이래 최고의 축하객이 모여 예식장에서는 우리의 결혼사진을 수 년 동안 게시해 놓고 자랑삼아 이야기 했다고 한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나에게는 뜨거운 열정과 마음 아픈 고뇌의 파도들이 숨가쁘게 휘몰아치던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이 젊음일까? 젊음만이 통과해야 하는
통과의례일까?
결혼식 사진(1975. 01. 08)
가정적으로는 결혼한지 1년만인 1975년 12월 10일 목포 콜롬반 병원에서 장남 태훈이가 태어났다. 아들 태훈이의 태몽은 동료 여교사가 받아 주었는데, 국기 게양대에서 태극기를 내리고 있는데 그 태극기를 내가 다가와 받아가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었다. 태몽이 좋았는지 태훈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였고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기대가 크다.
그때 임신 중이었던 아내는 자장면을 몹시 먹고 싶어 했는데 나의 짜증으로 맛있는 자장면을 제대로 먹지 못해 지금도 선운함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의 외가를 닮아서인지 태훈이의 피부가 유난히 검다. 부끄러움이 많은 나는 당시 임신한 처에게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잘 해주지 못한 점이 내 일생에 큰 후회로 남아 있다. 그 보상으로라도 지금 잘 해줘야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생각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습관을 만들며 습관은 성격을 만들고 성격은 운명을 바꾼다는데 소홀함이 습관이 되었나 보다.
1977년 03월 01일자로 무안군 삼향국민학교로 부임한 아내는 부부교사라서 어린 태훈이를 맡길 수 있는 어린 여자 가정부를 두고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하루는 처 이모 아들인 박 봉수가 집에 들렸는데, “땀범벅이 된 아기는 어두운 큰방 장롱 손잡이에 돼지처럼 끈으로 묶어 놓고, 가정부는 밖에서 월세로 내어준 작은방의 아기를 보아주며 놀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급히 귀가하였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이 장면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망연자실 하였다. 즉시 가정부를 귀가 조치하고 처가에 양육을 부탁하여 아들 태훈이는 입학 전 시기를 외가에서 보냈다. 장인이 학교 교장이셨기 때문에 학교 관사에서 사셨고 이것이 좋은 교육적 여건이 되어 주었다. 1978. 02. 02에는 두 번째 아이 딸 나영이를 역시 목포 콜롬반 병원에서 순산하였고 이후 계속 친할아버지 할머니와 생활하며 자라게 되었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원래부터 교직에 관심을 두지 못하던 나는 1급 정교사 자격 연수 중, 공부까지 열심히 하지 않아 1급 정교사 자격 연수 점수가 나빠서, 이후 교감 승진하는데 어려움으로 되돌아와 나머지 교직 생활에서 많은 노력을 더 해야만 했다. 이 때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직을 벗어나려면 학력을 더 갖추어야 하겠는데 그러려면 광주로 진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벽지 점수가 필요하였으며, 따라서 다음 임지는 벽지학교여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난생 처음 벽지 학교 전근을 위해 교육장 장학사를 만나 부탁하는 소위 로비활동도 해 보았다. 그 결과 무안군에서는 벽지학교가 단 두 학교뿐인데, 그중 일로면의 영산강변에 있는 무안군 일로면 청호리 소재 벽지인 청망 분교에 1978년 03월 01일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교직에 어느 사이 순응하며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었다.
일로초등학교 교직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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