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명 '나자로'로 거듭 태어난 광주각화초등학교 근무시절
1992년 03월 01일자로 각화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마침 본교에는 지금은 심장마비로 갑자기 작고하시어 유명을 달리하였지만, 배짱 좋고 호탕하고 매사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던 고향 선배인 이동철 선생님이 교무를 하고 있어서 적응을 빨리할 수 있었다.
부임 다음 해에는 연구학교 주무 부장을 맡아 추진하는 등 업무에도 열심이었지만, 날마다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교무 선생님 덕분에 또래의 젊은 동료들과의 어울림으로 하루하루의 학교생활이 즐겁고 보람 있었다.
동학년 동료교사들과의 즐거운 한때
그래서인지 그 시절 함께 했던 선생님들이 보고 싶어 이름이라도 불러 보고자 한다. 황영의 허병기 교장선생님, 한상봉 교감선생님, 이동철 신진수 기영헌 박영섭 조옥형 최승자 송미나 리정심 조금미 임 연 정지영 나서옥 김흥식 조영란 김경아 황덕자 김은영 이명휘 안종희 권선주 윤 정 최판규 박희분 김순복 손재순 조운태 허길무 권일구 조상기 정태정 노창섭 오왕이 조춘원 양재완 성덕환 서정윤 선생님 등이다. 이 분들 중에는 벌써 여러분이 타계하셨으니 인생 무상함을 실감하게 된다.
교직원 일동
지속적인 나의 연구 활동은 제24회, 26회 전국 교육자료전, 제9회 광주 특수교육 자료전, 국민정신교육, 산수과 경시대회지도, 산수과 학습지도, 국민정신 교육 발전 연구 등에서 수상하였다.
연수활동으로는 특수교육의 방법과 전략, 발달장애 언어치료, 특수아동의 교육심리진단평가, 국민학교 학습지도, 한국보이스카우트 제28기 대지도자과정, 특수학급 담임교사과정, 특수교육과정, 스카우트 훈육 지도교사 자격 등의 연수 과정을 이수 하였다.
또한 지역 교육청의 교육과정 이수평가위원, 놀이마당 지도자료 개발위원, 교육방송 활용 시청 지도 분과 위원, 월말평가 출제위원, 학년단위 학력관리 위원, 주관식평가 출제위원, 교단선진화 자료개발 위원 등으로도 활동 하였다.
특히 교육방송 활용 시범학교 운영 주무 부장으로 활동한 공이 인정되어 ‘93년 7월 일본 교육방송활용 시범학교 시찰을 하였고, 같은 해 10월 11일부터 10월 20일 까지는 같은 공적으로 한일 문화교류 일원으로 재차 일본을 시찰하는 등 교육적인 보상의 기회도 있었다.
일본 방문시 환영식장 및 홈스태이 가족과 즐거운 한 때
가정적으로는 괴로운 일도 있었으니 그동안 지병으로 고생하던 아내의 병세가 악화되어 광주 기독병원에서 자궁 근종으로 인한 수술을 받게 되었다. 길어도 2시간이면 끝날 수 있다던 수술시간이 예고 없이 길어졌다. 2시간이 지나자 조급해지며 겁이 나고 큰 문제가 생겼구나 싶어졌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를 나도 모르게 부르게 되었고, ‘살려만 주시면 당장 성당에 나가 하느님을 믿겠노라’는 약속을 마음속으로 하게 되었다. 수술은 자궁을 들어내는 큰 수술로 4시간 만에 성공적으로 끝났으며 ‘92. 05. 24일 하느님과의 약속대로 두암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수녀님께서 추천해 주신 ‘나자로’가 되었다.
‘92.05.24 세례식
이미 천주교 세례를 받고 ‘마르타’의 세례명을 갖고 있던 아내의 간절한 권유도 있었지만 평소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성숙한 나이가 되면 종교를 갖겠다.’ 는 생각은 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내심 예정하고 있던 시기에 비하면 10년은 빨라진 셈이었다. 죄 많고 불쌍한 나에게내려진 하느님의 은총이요 섭리라 여겨진다. 조금이라도 죄를 적게 짓도록 하기 위해 내려진 오묘한 이치를 보이시며 흠 많은 이놈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흠숭을 드린다. 그렇게 천주교 신자가 된 나는, 주일 미사는 빠지지 않을 만큼의 열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 부부에 이어서 아들(후고)과 딸(글로리아 프란체스카)도 세례를 받아 우리 가족은 드디어 성 가정이 되었다. 나는 주변 친우들에게 나름 선교를 한답시고 농담처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의미 없이 죽어 가는 것으로 끝이라면 너무도 허망하지 않은가? 하느님을 믿어서 천당에 갈 수 있게 되었다면 땡 잡는 일이고, 혹여 죽어보니 천당이 없다 하더라도, 세상을 사는 동안 내게 주어진 고통과 불행을 주님과 함께 나누어 질 수 있어서 그나마 다소의 평안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손해 볼 것은 없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라고.
영세례 받은 후에도 수년간 막연한 기도만을 하던 나는, 아들과 딸이 결혼한 이후에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 기도’ ‘가정의 기도’ ‘레지오 마리에 까떼나’ ‘프랭크 터프 시복 청원 기도’ ‘묵주기도로 드리는 9일 기도’와 ‘성서 읽고 쓰기’ ‘저녁 기도’를 계속하며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 저의 아들 ’김태훈 후고‘ 딸 ’김나영 글로리아‘의 가정에 더 많은 자녀를(나중에는 2자녀 이상) 점지하여 주시고, 그들이 참된 인간으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역사하여 주시며, 그들을 관리하고 주관하시어 하느님의 맘에 드는 종이 되도록 허락하시고, 저의 부부 또한 건강한 몸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잠자듯 주님 곁으로 함께 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한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걱정하지 말거라! 이루어 질 것이다.’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자기 최면을 걸어 보기기도 한다.
이 글의 말미에, 많은 기도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해서 지속적으로 바치고 있으며, 신약성경 내용을 포괄하고 있는 ‘묵주기도로 드리는 9일 기도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아마 이 묵주기도야 말로 네게 매우 좋은 노후 대책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1994년 09월 06일에 아내는 건강한 몸으로 ‘견진 성사’까지 받았다. 늙어가는 나로서는 이런 기도만이 내가 가족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나 하고 생각한다.
본교에서는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종교에 귀의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어 더욱 잊을 수 가 없다.
가정적으로 1993년에는 딸 나영이가 신광여중을 졸업하고 동아여고에 입학하였으며, 평소 장남으로서 큰집에서 모든 가족이 함께 하기를 원하였던 나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파트를 키워가기로 마음 먹었다. 평수가 큰 운암동 대주아파트를 계약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1995년 입주를 기다리게 되었고, 19‘94년에는 아들 태훈이가 광주 숭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단번에 입학하여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아들 태훈이의 20사단 훈련소 퇴소식
아내는 1995.03월 01ㅇ자로 운암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으며, 그 해 아들 태훈이는 사법고시 준비를 위한 사전 준비의 일환으로 군 입대를 결정하였고, ’95년 5월 20사단 훈련소 퇴소식에 우리 부부가 참석 하는 등, 이 시기가 내 인생에서 공 사간 활동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유수 같은 세월은 흘러 나는 다른 학교 발령을 준비해야 했다. 시 교육청 인사규정이 바뀌어 그 동안 5년 주기였던 학교 간 인사이동이 4년 주기로 바뀌어 또 다시 가야할 학교 선택의 시기가 돌아 왔다. 그 동안은 승진을 위한 점수따기 학교 선택이었다면 이제는 지치기도 하고, 승진을 위해 점수 따는 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라는 진리도 터득하였고, 이제는 크고 좋은 학교, 소위 선호도가 높은 학교를 선택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집에서도 가까운 광주 태봉초등학교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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