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처음 만난 진도군 군내북초등학교 근무 시절
36개월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1971년 3월 1일자로 복직한 학교가 바로 전남 진도군 군내 북 국민학교였다. 각 학년 2학급 총 12학급의 학생 수 500여명, 교직원 12명의 전형적인 시골 학교였다. 그때 동료 교직원은 다소의 변동이 있었지만 허 진운 교장선생님, 이 춘태 교감선생님, 김 남조, 이 대성, 이 정영, 김 생수, 한 규철, 이 유순, 허 송순, 박 원숙, 김 성래선생님 등으로 기억된다.
목포에서 뱃길을 따라 여객선으로 2시간 거리인 진도군 군내면 녹진 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제대 후 첫 부임으로 사회 물정을 모르던 나를 위해 아버지께서 동반해 주셨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전 교직원은 물론 학생 지역사회 학부모 모두가 순박하고 인정이 넘치는 분위기에 젖어 즐거운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학교 교문 앞 귀덕이네 집에서 동료교사인 생수 선생님과 각방을 쓰는 하숙생활을 하였다. 주로 사범학교 출신 교사가 대부분이던 그 시절 교육대학을 나온 엘리트 교사로 교직원 학생 학부모님들의 기대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학기 초 가정방문 때에는 정이 가득 담긴 고구마, 삶은 달걀 등을 대접 받았고, 학부모님들의 가정에 제사라도 있는 날이면 학구 내 동네마다 어느 집에서라도 전 교직원을 초대하여 대접하던 후한 인심은 지금은 변해버린 세상인심을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운동회 때 고학년 꾸미기 체조를 지도하여 어려운 5층탑을 성공시켰던 기억이며, 과학전람회, 독서요약서 쓰기, 학습자료 전시회 등에서 입상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학교생활에서 무엇이든지 잘 해보겠다는 의욕과 열정은 앞섰으나 군대를 갓 나온 풋내기 교사로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이다.
교육대학에서 배웠던 감동 감화형 교육이론의 적용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의욕만 앞서 체벌과 고성의 지시형, 파쇼교사의 전형으로 지금은 많은 후회와 함께 용서를 빌고 싶다. 교장선생님의 막내 딸 행아가 있던 5학년 2반 담임을 맡았을 때는 행아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교장선생님 딸이라서 그러느냐?” 는 식의 트집을 잡아 몹시 심하게 다루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고, 지금은 나의 처제가 된 행아에게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가 없을 지경이다.
5학년2반 담임 시절 학생들과 소풍가서
그곳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가끔씩 찾아주는 동네 처녀들의 찐 고구마, 배추쌈 등의 밤참을 잊을 수 없다. 주말에 목포에 있는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 운동도 하고 몸을 풀던 날이면, 지금은 나의 장모님이 되신 교장선생님의 사모님께서 나를 불러 대접해 주던 구기자 막걸리는 정말이지 일품이고 환상적이었다.
교장선생님의 둘째 딸인 송순 선생님과는 동료교사로서 수업이 끝나면 자주 교실방문을 하게 되면서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으나 마음이 끌리기 시작한 것은 목포 집에 가지 않았던 어느 일요일, 그곳 시골 마을교회에 갔었는데 허 송순선생님께서 성가대 반주를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이 참 고상하고 숭고하게 느껴져 집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게 되었고, 잠도 많았지만 새벽 기도를 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는 어느 일요일 목포 집에 갔다가 목포에서 정기 여객선을 함께 타고 귀교하던 날이었다. 항상 맨 얼굴이던 선생님이 화장기 있는 얼굴에 파마 고대까지 한 긴 머릿결을 바람결에 흩날리며 뱃전에 서 있었는데, 사색에 잠겨 있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연애 시절 서울 남산에서
하선하고 귀가하던 산길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첫 입맞춤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젊은 시절 상당한 미남(?) 반열에 속해 있던 나는 그로 인한 인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곤혹스러움도 맛보았다. 어느 날은 목포에서 평소 가까이 지내던 어머니 친구분의 딸이 연락도 없이 갑작스럽게 하숙집으로 방문을 하였다. 평소 친척처럼 친하게만 지냈을 뿐인데, 느닷없이 혼자 하숙하는 총각 집에 아가씨가 찾아오니 당연히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다행히 생수 선생님의 방에서 함께 잠을 청함으로서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는 모두 젊은 날의 한 장의 드라마가 되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된 일이냐?” 한 마디의 언질도 없었던 허 선생님과 그녀의 가족은 점잖고 착한 선비 집안이었다.
이렇게 1년 8개월의 근무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고향인 무안군으로 발령을 받았다. 해제면 해제 국민학교였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실력자의 말 한마디면 인사이동이 가능하던 시기였으므로 아버지께서는 사전 협의나 언질도 한마디 없이 인척 관계에 있던 무안군 교육장을 통하여 힘을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목포에서 근무하고 계셨기 때문에 자식과 함께 기거하기를 기대하셨을 것이다. 젊음 때문이었을까? 타고난 무책임함이었을까?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곳을 떠나오고 말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허 선생님께서는 졸도하고 병원에 입원하여 수혈을 받기까지 했었다니..... 그 시절, 나는 참 대책이 없는 인간이 아니었나 싶다. 인간은 그렇게 미완의 작품으로 이 세상에 와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가면서 성숙해 가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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