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part 1 5 . 사회 생활을 미리 터득할 수 있었던 방첩대 시절  

소광선생 2017. 3. 26. 06:00

  

                          사회 생활을 미리 터득할 수 있었던 방첩대 시절

 

   교직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나는 196831일자 진도군 오산면 오산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으나 이미 423일자로 입영통지서도 함께 받아놓은 상태였다. 초임의 초등학교 근무 한 달째인 45일자로 군복무를 위한 휴직과 동시에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였다. 생각 없던 젊은 시절의 객기였을까? 학기 초인데 학교나 학생들에게 못할 짓을 한다는 죄책감도 없이 입영을 위한 사표를 내고 말았다.

    그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 달간 함께 하숙을 하던 두 분 선생님이 밤이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동네 처녀들과의 미팅이었음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나는 함께하지 않았고 워낙에 짧은 기간이라서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억세다고 소문난 진도 섬 처녀들과의 이렇다 할 추억도 없다.

    한 달 분의 월급을 받던 날 교장선생님께서는 이 월급을 비용으로 군 입대 연기를 하고 다시 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교직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던 나에게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후 군대 복무기간이 36개월에서 26개월 까지 짧아졌었으니 교장선생님 말씀대로 군복무 연기조치를 하였더라면 나의 인생행로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 인간의 인생행로란 참 신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와중에도 나는 첫 봉급을 부모님께 선물이라도 했어야 옳을 일이었으나 군 입대를 앞둔 상태이기도 하고 제대 후 대학교 편입을 위한 준비금을 위해 어머님께 맡기면서 시골 외삼촌에게 부탁해서 돼지를 사 길러 조금이라도 큰돈으로 불려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 때는 새끼 짐승을 부담 없이 사서 큰 짐승으로 키워 파는 방법으로 재산을 형성하는 것이 시골에서의 일반적인 재테크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대를 하고 와서 보니 그 돈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내심 그 돈으로 대학 편입을 하겠다던 내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돈을 어머니께서 사용하신 것인지, 외삼촌이 써버린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보살처럼 착하시기만하시지 자식의 장래까지는 배려가 어려우셨던 어머님에 대해 신뢰가 무너졌으며 그 이후 나는 재산을 모으는 일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무척 억울하고 화가 난다. 

    논산 훈련소로 가는 군 입대 야간열차를 타는 나에게는 한 사람의 배웅자도 없었다.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불쌍한 인간이었구나 생각된다. 밤새 달려 새벽에 도착한 논산 훈련소 막사에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는 군상들이 나를 무섭고 겁나게 했다. 다음날 대대 중대 소대 부대 배치를 받고 2분대장이 되었다. 세상에 나와 처음 얻은 벼슬(?)이었다. 3분대장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홍술이가 맡았다. 그래서인지 더욱 든든했다. 훈련소 이후 그 친구와 연락을 못하고 지냈으니 그나 나나 한심한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견디기 어려운 기압은 날마다 있었고, 기압 중 쌩 똥을 싸는 훈련병이 있을 정도였다. 배 고품을 못 이겨 잔반통의 잔반을 뒤져 먹는 같은 내무반의 훈련병도 보았고, 거적만 걸쳐 놓은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고 있으면 먹을 것을 파는 여인들이 귀찮게 하는 등 새로운 세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 시절 훈련소가 견디기 어렵다고들 했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 이런 곳이 훈련소구나 하는 정도였다. 어떤 어려움이라도 견뎌내려는 인내심과 적응력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일도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얼굴을 씻고 있는데 누군가 세면기를 훔쳐 달아나 버렸다. 정말 군대식으로 나도 똑 같은 방법으로 보충했다. 이런 용기가 어디에 있었을까(?) 내 스스로도 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8주간(?)의 신병 교육대 훈련이 끝나고 082 병과의 방첩교육대에 배치를 받아 다시 4주간(?)의 방첩교육을 받게 되었다. 김 만원 082 호명이 떨어졌을 때 나는 다른 훈련병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 교육이 끝나면 간첩 등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특별한 임무 때문에 권총을 차고 사복근무를 할 수 있는 등 군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특권이 주어지는 방첩대원으로서 방첩부대에 배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은 없으셨지만 이는 공무원으로 발이 넓으셨던 아버지의 배려 덕분이라는 생각이었다. 무섭고 살벌하기까지 하시던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교육이 끝나고 나는 220방첩부대(20사단 방첩대)에 배치를 받았다.

    특권(?)이 부여되는 이런 부대에서는 파견근무를 해야만 특권을 행사할 기회가 많아 파견근무를 선호하는데, 천성이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나는 더 이상의 힘의 작용이 없자 1주일간의 대기 시간을 끝내고 정보과 내근을 명받았다. 방첩부대라고는 하나 군대라는 큰 영역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 겨울이면 기름이 얼 정도로 추운 밤에 야간 불침번 근무도 하고 내무반의 기압도 받아 보았다. 근무 시간에 특히 친절하게 안내하고 업무도 잘 가르쳐주던 사수 이덕훈 상병과 기압과 잔소리가 심하던 경상도 사나이로 당시 내무반장이었던 감길상 병장을 잊을 수가 없다. 참 보고 싶은 인물들이다.

    더불어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색시가 있는 술집에서 환영주도 마셔보고 여자를 곁에 앉혀 안아 보기도하였다. 그 동안 너무 세상을 모르고 살아온 나에게 군대는 이렇게 사회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군대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었다. 일반 사회에서 남자는 꼭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 는 말이 있는데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 시기나 기간에 문제가 있기는 하다.                

                                                      220방첩대 시절

 

    한참 공부해야하는 학창시절을 피해야 하고, 그 기간도 짧았으면 좋겠다. 공무원 수준의 대우로 직업 군인을 많이 뽑는 모병제는 어떨까? 대우만 적당하다면 넘쳐날 것이다.

      그냥 그렇게 1년여의 근무가 끝나갈 무렵 다시 전라남도 광주 505 방첩대로 전속하게 되었다. 알 수는 없지만 이 또한 아버지의 배려였을 것이다. 역시 이곳에서도 한 달 이상 긴 대기 시간을 거쳐 본부 정보과에 배치되었다. 후에 생각해 보니 전방에서 후방으로 전속된 것으로 보아 대단한 배경의 소유자로 보이는데 더 이상의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대기 기간만 길어지고 결국 하급부대 배치나 출장소 파견근무는커녕 층층시하 상급자만 많은 본부 정보과에 배치되어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수를 모시고 제대할 때까지 근무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세상 물정에 아직도 어두웠다.

   이곳에서 나는 사복 근무를 하면서 금남로 , 충장로를 활보하며 다니고 시군 단위 하급 부대에 보고서 독촉도 하면서 병장 진급은 못하고, 상병으로 내무반장까지 하고 제대하게 되었다. 세상을 속속들이 배울 수 있고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기에 너무나 좋은 자리와 위치에서 또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을 생각하면 꽉 막히고 답답한 내 자신이 너무나 아쉽고 미웠다. 인생은 역시 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대로 되어 지는 것임을 다시 실감한 시기였다. 내 영혼이 병들지 않은 좋은 점도 있었지만 참 아까운 시간이었다  

                                         505 보안부대 시절

 

    드디어 1971217일 군 제대 명령을 받고 광주 31사단 향토부대에서 전역하였다. 지금 그들 전우들의 이름은 잊혀져가지만 보고 싶고 그리운 부대원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제대 후 잠시 집에서 쉬는 동안 220 보안 부대에서 친하게 지내던 상철이라는 친구가 고려 대학교에 복학하고 목포 집으로 찾아 왔었는데 아직도 사회성이 부족하던 나는 그 친구를 혈기 왕성한 젊은 어른처럼 대접하지 못하고 평범한 손님 수준의 접대만으로 보내어 그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그 후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늦었지만 그 때 내 사정 내 수준이 그랬었노라고 지금이라도 사죄하고 싶다. 친구야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