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지기 키우던 초등생 '새벽 까치'
"우리는 누구나 기억의 창고에서 아련한 그리움이 고인 옹달샘을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살아가는 나날들이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곳으로 가서 물 한 바가지를 떠 마시고 쉴 수 있는 그런 조그마한 샘. 그 샘물을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고 내 기억 속에서 나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 삶에 그런 오아시스가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삭막하게 메마른 이냉길을 걸어가야만 할까? - 김미성 수필 '안문'
적가는 고향 이야기를 시작하며 서두를 이렇게 적고 있다. 고향에의 그리움, 어린 날의 아련함을 옹달샘에 비유하여 말하고 잇다. 나 또한 이 글을 읽으면서 수십년을 잊고 지냈던 어린 날들의 기억을 오래된 창고창고에서 퍼올리며, 인간이 인간의 햐ㅇ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자구 꺼네보며 살아야할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어려서 장난 끼가 심했던 나는 적년보다 1년 빠르게 1953년 3월 1일 고향 학교인 무안군 일로면 죽산리 소재 죽산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학교까지 매일 왕복 8km 걸어서 다녔다. 요즘같이 자동차나 자전거 같은 적당한 탈 것이 없던 시절이라 하루에 1시간 이상을 걸어서 학교에 가곤 하였다. 어쩌다 빈 소달구지라도 만나게 되면 가끔씩 얻어 타는 횡재를 누리기도 하였지만 그런일이 1년에 몇 번도 되지 안았다. 대부분 조무래기들 10여명이 무리를 이루어 같이 걸어서 통학을 했다. 그 무리에도 나름의 규율이 있었는데, 우리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았던 종석이나 오동이가 우두머리 격으로 우리를 보호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면서 이끌었다. 마을에서 비교적 잘사는 큰댁에서 살던 나는 자랑삼아 날마다 주머니에 쌀을 퍼 나르는 것이 일이었다. 이제야 스스로 비밀을 폭로하게 되었지만,한 번은 큰 아버지의 부로바 시계를 가지고 다니며 놀다가 싫증이나자 두목격인 오동이에게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주어 버린 일도 있었다. 어른들이 시계를 찾고 야단이었지만 끝끝내 모르쇠로 일괂여 위기를 모면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철부지였던 어린 시절이 지금에 되돌아보니 조금은 후회스럽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무척 그립고 아련한 향수에도 젖어들게 한다. 여름엔 자방포 수문이나 마을 앞 방죽에서 멱을 감고, 인근 밭에서 아직 덜 자란 고구마를 캐서 잔디에 그냥 문지르거나 이빠로 껍질을대충 벗긴 후 그냥 먹는가 하면, 적당히 익은 보리를 모닥불에 그을려 손으로 비빈 후 호호 불어 먹기도 하였다. 가을이면 들판의 고구마, 무우 이삭 서리를 하기도 하였다. 정말 꿈만 같은 즐거운 시절이었다.
힘든 건 비오는 날과 추운 겨울이었다. 비오는 날은 우산이 없어 마대를 뒤집어쓰고 다녔고 추운겨울 영화정 산 고개를 넘을 때는 코끝, 귀 끝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때는 산길로 다녔다. 한결 따뜻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다니던 나는 아버지가 선물로 보내주신 스웨터까지 입고 다녔는데, 어느 날 저고리 속에 입었던 스웨터를 자랑하고 싶어 밖으로 꺼내 입었다가 다시 속으로 입었는데 스웨터 속에 있던 통통하게 살찐 '이' 들이 그대로 저고리에 붙어 기어 다니고 있어서 크게 창피를 당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54.03.01-'69.02.20(국민학교 6학년 졸업기념 ‘은사를 모시고’ )
꼭 배가 곱아서 라기 보다 군것질 할 것이 없었던, 우리들의 어릴 적 기억은 단연 먹을 것이었다. 학교에서 도시락을 열면 거무튀튀한 보리밥이거나 샛노란 조밥에 반찬은 시큼한 김치 한 가지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맛이 있었다. 집에서는 큰 아버지와 겸상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날은 행운이었다. 육개장까지 있어 반찬도 좋았고 큰 아버지가 남기시는 쌀밥이 나의 차지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암 닭이 알을 낳는 곳을 지키고 있다가 어른들이 챙기기 전에 먹어 치우고 시침을 따기도 하고, 달걀에 바늘로 구멍을 내어 귀신같이 먹기도 하였다.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속담처럼 그때는 초근목피를 먹었다. 삐비를 뽑아 껌처럼 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생키를 하모니카 불듯 이빨로 훑어서 먹었다. 찔레 꽃대며 진달래꽃도 꽃 이전에 먹을 거리였다. 종가인큰아버지댁 마당 우물가에는 커다란 비파나무와 석류나무, 그리고 몇 그루의 무화과나무도 서 었었는데, 그 열매들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시인의 유년의 기억을 노래한 ' 귀歸)'라는 시는 내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금잔듸 사이로/ 하얀 삐비꽃 피던 고향에 / 돌아온 밤/못자리 논두렁에 길게 누워 / 소 눈망울로 / 하늘응 보았습니다.
별빛은 하도 고와서 / 서럽게 빛나 / 아지랭이 풋잠에 빠져드는 / 두 눈망울 위로 / 서리서리 쏟아집니다.
논물에 슬그머니 발을 담그고 / 삐비꽃 별들과 도란거릴 때
개구리 울음 소리가 / 울근울근 / 맨발을 간지럽힙니다.
겨울철이면 나이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참새 잡이도 했다. 초가집 지붕 이엉 속에 참새가 산다. 구멍에 손을 넣으면 따듯한 온기와 함께 참새가 잡힌다. 한 주먹에 들어오는 불쌍한 파닥거림도 군것질이 즐거운 아이들에게는 참새구이의 먹을거리에 불과했다. 문득 고승들의 일화를 담은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난다.
엣날에 진표 율사라는 유명한 스님은 열 살 무렵 개울가에서 잡은 개구리들을 나뭇가지에 꿰어 개울물에 담가두고 그대로 잊어버리고 집에 돌아갔다. 다음 해 봄 무심코 개울가를 지나가는데 자기가 지난헤 잡아 나뭇 가지에 꿰어 놓은 그 개구리들이 그때까지 살아 고통스럽게 울고 있음울 보게 되었다. 개구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생면을 잔인하게 다룬 행동을 크게 뉘우치고 진표스님은 출가를 ㅠ결심하였다고 한다. 지그 생각하면, 어린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고 괴롭힌 일들이 마음이 아프지만 그때는 아무런 철도 없었으니 그저 재미로만 족했던 것이다.
그 시절 학교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참 많았다. 아마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물자였을 것이다. 학교에서 우유, 강냉이 가루를 배급해 주었다. 밥 위에 올려 쪄 먹는 가루우유나 강냉이 가루는 최고의 간식 거리였다. 학교에서 한 번은 젊고 미남인 남자 선생님이 큰소리를 치며 큰 돌로 가루우유 통을 박살을 낸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까닭이 두 가지로 해석되어 진다. 하나는 학생들이 먹을 우유가루를 왜 학교에서 마음대로 처분 하느냐는 것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 나는 더 적게 주느냐‘는 것이었을 것 같다. 그 선생님은 결국 후에 사표를 내고 전기안전공사에 취직해 상당히 높은 위치에 까지 승진한 후 퇴직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봄, 여름에는 장마에 발목까지 빠지는 통학로와 운동장에 깔 자갈 줍기, 가을이면 겨울철에 쓸 난방용 솔방울 등 땔감 줍기 겨울이면 선생님들이 드실 매운탕의 주재료인 토끼와 노루 잡이 등 수많은 추억들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들은 선생님이 하시는 뻥 튀기 발언까지도 모두 믿으며, 말 그대로 선생님을 하느님처럼 존경하며 학교생활을 하였다. 1,2학년 때는 교실 바닥이 없어 땅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수업을 받았으며, 창문에는 유리가 없어 추운 겨울에도 광목천으로 막고 지냈다.
이 심하고 매사 끼어들어 나불대는 나를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셨던 ‘이 헌복 선생님’은 나의 별명을 ‘새벽까치’라고 지어 주었다. 어린 나이에도 참 ‘선생님다운 선생님’이라고 여겨졌던 그래서 더 엄해 보였던 4학년 때의 ‘윤 갑병 선생님’은 나의 교직 생활 7년 차이던 ‘청망분교’에서 동료교사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인 것을, 동료 교사 그 이상 잘 대해 드리지 못한 점이 지금도 후회스럽다.
년 때는 새벽까치라는 별명처럼 자주 설쳐대던 나는 싸움도 자주하여 ‘홍래’라는 친구에게는 돌맹이로 등짝을 맞아 몇 년간 아팠으나 말도 못하고 고생하기도 하였고, 집안도 부유했고, 작은 체구에 몸이 빨라 달리기, 싸움도 잘 한데다가 얼굴이 얽어서 ‘곰보’라는 별명으로 통하며, 요즈음 말로 ‘짱’이던 ‘용진’이라는 친구를 정식 대결에서 코피를 쏟게 하고 승리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3학년 수학여행 때는 나를 큰댁에 맡기고 무관심한 부모님 덕에 여행비용을 내지 못하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최영록 담임선생님께서 식사용으로 가져가는 ‘쌀 2되만 가지고 가자’하여 공짜 수학여행을 하기도 하였고, 1960년 2월 졸업 때는 아버지 친구인 담임선생님 덕에 지역 유지인 큰 아버지 친구인 기성회장님의 상을, 타기도 하였다.
공부는 보통이었고,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친구는 없으나 주택 공사의 부장까지 올랐던 오남석, 고등학교 교사였던 고성일, 서울에서 사업하던 나은렬, 이명주, 오윤석, 목포에서 사업하던 나종칠, 이종진, 고향에서 농사짓던 이학수, 이흥렬, 공무원이던 이도수, 김성현, 초등학교 교사이던 장홍래, 정귀인, 전업 주부인 이순자, 정정례, 홍서운, 장영순, 이연숙 등과는 지금도 교분을 나누고 있다. 그 시절 나는 여러 여자 아이들 중에서 눈이 큰 연숙이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놀란듯 깜박이던 그 눈망울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첫 사랑에 눈을 뜨는 것이었을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순수 그 차체였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어머니의 젖 부족으로 약골인데다 현재 당료병이 있는 나는 지금도 걷기를 하면 지치지 않는데 시골에서 학교를 오가며 걷던 습관 때문일 것이다. 구불구불 좁지만 부드러운 길인가 하면, 먼지 풀썩이는 빨간 황토의 넓은 신작로 길, 그 살아있는 길이 그립다. 직선으로 뻗어만 가고 잡초하나 키워내지 못하는 도시의 길과는 비교할 수 없다. 봄날 뒷동산 언덕에 서면, 감미로운 미풍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넓은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고, 푸른 하늘 뭉게구름은 한없는 상상력을 키워주었다. 이것들은 명문학교나 강남학원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시골 그 자체로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벼 심고 가꾸어 베기, 땔감 나무하기, 풀베기, 지게질, 소 꼴 먹이기 등 시골에서 하는 일은 거의 다 해 보았는데 지금은 이 또한 잊을 수 없는 추억 거리이다. 이러한 성장 환경은 자연스럽게 호연직를 기르게 하였고 훗날 산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는 인성의 토대가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54. 03.01-’69.02.20 고등학교시절‘초등학교 반창회겸 동창회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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