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흥타령 축제
예로부터 가무를 즐겼던 한국의 특유의 정서인 흥(興)은 우리 모두를 신명나게 만드는 춤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이 흥겨운춤들이 한데 모이는 축제의 장이 사통팔달의 고장 천안에서 펼쳐집니다.
6년 연속 문화체육관광부 지역대표 공연예술제로 선정된 천안흥타령춤축제는 국내 최고,최대의 춤축제로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춤으로 하나 되어 신나게 즐기는 축제입니다. 세대와 인종,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춤들의 향연은 방문객 여러분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 드립니다.
모두가 한데 어울리는 즐거움의 한마당으로 방문객 여러분들의 유쾌한 경험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올해 천안흥타령춤축제는 16주년을 맞이하여 보다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하였습니다. 성별, 연령 제한 없이 누구나 참여 가능한 춤 경연,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규모의 퍼레이드, 세계 각국의 민속춤을 한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국제민속춤대회 등 흥미로운 볼거리와 신나는 즐길거리로 방문객 여러분들께 흥겨운 경험과 즐거운 기억, 신나는 추억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모두가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열린 축제.축제장 곳곳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유쾌한 축제. 방문객 모두가 함께 어울리고 즐기며 화합하는 대동의 축제. 천안흥타령춤축제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예당저수지(禮唐貯水池)
예당저수지(禮唐貯水池)는충청남도 예산군에 있는 저수지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다. 조선 시대의 국사당보를 모체로 1928년 4월에 착공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말기부터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52년 12월에 다시 착공해 1964년 12월 31일에 준공되었다. 예산군 신양면, 광시면, 대흥면, 응봉면에 걸쳐 있다. 만수 면적은 10.9 km², 저수량 4천710만 m³, 만수위는 22.5m이다. 예산군과 당진시의 농경지인 예당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고 해서 예산군과 당진시의 앞머리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중부권 최고의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겨울철 얼음낚시 외에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계속 낚시할 수 있다. 주로 붕어·잉어를 비롯한 민물고기가 대부분이다. 1969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개발되어 다양한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 겸 저술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덕산 출생이다.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墴)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成周錄)의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裵用順)과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해미읍성
역사
1417년(태종 17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414년(태종 14)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이설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축성이 완료되었다. 해미읍성은 원래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되었는데,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이 성에 주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세조때에 군사 제도가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되면서도 이 역할은 여전하여 충청도 지역의 주요 군사거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1651년(효종 2년)에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해미현 관아가 옮겨와 해미읍성이 되고, 문무를 겸한 겸영장이 배치되며 호서좌영으로 명칭이 바뀐 이후, 호서 지방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해미읍성이란 명칭도 이때 개명된 것으로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4년에 군현제가 폐지되고 해미현이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읍성은 폐지되었다. 폐지 이후에는 성 안에 면사무소, 초등학교 등 기관과 민가가 들어섰다. 해방 후 1963년 1월 21일 사적 116호로 지정되었다. 1970년대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성내 건물을 철거하고 동헌, 객사, 내아 등을 복원하였다. 2000년대부터 정비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성내 동헌, 객사, 내아 등을 정비하였고, 2004년부터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2014년 8월 17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방문하여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주례하였다.
해미읍성과 천주교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당시 천주교의 교인이란 죄명으로 해미읍성으로 열흘간 귀양을 왔다.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이에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 13개군현의 군사관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 자택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모두 해미읍성에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800여명이상 이었다고 전한다.
충청 병영에 부임한 충무공 이순신
이순신은 1576년(선조 9년) 무과 급제하고 권관과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세번째 관직으로 1579년(선조 12년)에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에서 10개월 간 근무하였다. 당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공은 구차하게 낮고 고달픈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고 남을 따른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상관인 주장에게 부정한 사실이 있으면 극진히 말하며, 이를 바로 잡았고, 청렴한 자세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면서 털끝만큼도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구조
총 길이는 1,800m이며, 성벽 높이는 5m이다. 성벽 밖에 2m 깊이의 해자를팠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삼년산성 등이 산에 쌓은 산성이라면, 진주성, 공산성, 사비성은 강을 낀 산에 건설되었는데 해미읍성은 평지에 타원형으로 지은 것이 특징으로 대략 달걀 모양과 비슷하다.
시설
- 관아문은 해미읍성의 호서좌영 관아 정문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형식의 건물로 아래층 3칸에 달아 그 문으로 통행하고 상층은 누각을 만든 전형적인 관아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쪽 정가운데 있다하여 일명 진남문으로 불린다.
- 옥사는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했으며 1790년부터 100여년간 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 곳에서 투옥하였다.
- 객사는 관찰사 등의 귀빈이 숙박하던 곳이고, 동헌은 지방 관아로 해미읍을 관할하던 관아이다.
- 책실은 책과 문서를 보관하며 현감의 자제가 거처하던 곳이다.
- 청허정은 읍성 내 정자로 휴게실의 용도로 쓰였다.
- 민속가옥은 옥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부농, 서리(말단관리), 상인의 집을 재현하였다.
- 회화나무는 일명 호야나무라고 불리며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72호로 수령300년 이상 추정되며,
-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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