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4.04.10 이정일 일행과 왕손 전주 이씨 시조 제레식에 참석하다.

소광선생 2017. 8. 18. 12:11

전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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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서산에서 세거한 전주 이씨입향 시기는 1400년대 이후로 여겨진다. 창령군은 어머니 밀양 황씨를 따라 외가인 부석면 강당리에 터를 잡아 살았고, 정종의 10남 덕천군의 증손 변성군 이계연은 서산의 토착 성씨인 서산 송씨 송효명의 손녀와 혼인하면서 서산과 인연을 맺었다.

창령군은 회안대군의 차남으로, 회안대군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전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창령군의 권유로 상경하다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창령군은 전주로 가 3년 상을 치르고, 신위를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으로 옮겨와 봉향하였다고 한다. 1422년(세종 4) 회안대군을 모시는 사당이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강당리에 건립되었으며, 지금도 사당 일대와 서산 곳곳에 창령군의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창령군의 외가인 밀양 황씨는 1619년에 편찬된 서산의 사찬읍지 호산록(湖山錄)』에 보이는 황씨들과 인척 관계에 있었음이 추측된다. 이외에도 『호산록에는 향임 황유성(黃有誠)과 효자 황필대(黃必大), 송유미(宋惟微)의 외손인 황위(黃瑋)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서산에는 또 다른 계열의 전주 이씨의 입향이 있었다. 이는 정종의 10남 덕천군의 증손 변성군 이계연이 송유명의 딸과 혼인하고 처가와의 인연으로 입향한 것인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조선 전기 서산의 전통 있는 성씨인 송씨가 등장한다. 『호산록에는 이계연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의 아들 이이수(李頤壽), 이기수(李期壽), 이학수(李鶴壽), 이난수(李鸞壽)와 손자인 이유검(李惟儉), 이유직(李惟直), 이유성(李惟誠) 등에 대한 매우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호산록』의 산천조 기록 중 ‘소담봉(疎淡峰)’에 관한 설명에서, 소담봉은 들판에 솟은 봉우리인데 남향 사면에는 이유성의 선영이 있다고 하며 “이씨가 본읍에서 가장 번성하였는데, 병사(兵使) 이이수4형제가 한 시기에 등과하고 일가친척 및 지손파와 종손파를 아울러 10여 명의 등과한 분이 있어, 판서 혹은 병사·수령·생원·진사·남반이 대에 끊기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변성군의 자손들 역시 조선 전기에 서산의 명문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호산록』 고금인물조에는 변성군의 자손 중 13명을 이 지방의 훌륭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관련 기록에 “어느 가문도 세 사람 이상 기록되지 않았는데도 한 집안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이 벼슬길에 나가거나 학문에 정려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생활이 올바름으로서 지역에 귀감이 되는 것이라.” 하여 당시 전주 이씨가의 명성과 전통을 짐작할 수 있다. 서산의 전주 이씨는 문무과에 걸쳐 88명이나 되는 많은 수의 인물들이 등과하여 조선 후기에서 한말에 이르기까지 서산 지역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1920년에 조사, 발간된 『조선의 성(姓)』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유력한 세거 성씨를 파악하기 위한 자료이다. 당시 서산 지역의 전주 이씨 집성촌을 살펴보면 서산시 양대동에 43호, 인지면 야당리에 16호, 부석면 강당리에 165호, 정미면 여미리에 35호가 기록되어 있다. 기록과 같이 서산 지역의 전주 이씨부석면 강당리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강당리에는 회안대군 이방간 후손이 500여 년 간 거주한 곳으로 회안대군을 제향하는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변성군의 후예들은 수석동음암면 신장리 동암마을을 중심으로 살았으며,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들을 구리바위 이씨[銅岩李氏]라고도 불렀다.

부석면 강당리에는 태조의 4째 아들인 회안대군의 위패를 봉안한 숭덕사가 있으며, 숭덕사는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자료 제352호로 지정되었다. 창녕군의 묘소는 부석면 지산2리에 자리하였고, 변성군의 묘소는 수석동 소탐산국도 29호선에 근접하여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