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part 4 3.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소광선생 2017. 5. 1. 16:44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이제서야 후회가 밀려온다. 나날이 작아지는 부모님 목소리에 과장된 맞장구로 자신감을 심어드릴 것을. 더 자주 전화 올릴 것을. 어르신들은 아주 작은 것들로 마음이 상할 수 있다는 것을 헤아릴 것을. 젊은 사람이 가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경쾌한 종업원의 서비스를 받으며 스파게티나 스테이크를 드시는 것도 당신들이 응당 누려야 할 색다른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게 해 드릴 것을. 비싼 전화기가 무슨 소용이냐는 어머니의 말씀에도 최고급 스마트폰을 사드릴 것을. 그래서 친구들에게 마음껏 자랑할 수 있게 해 드릴 것을.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 여행도 다리 아파 못가시겠다고 고집 피우셔도, 아픈 다리 따로 있고, 노는 다리 따로 있는 것이라며 업고 안아서라도 비행기에 태워드릴 것을. 당신들이 습관처럼 보이는 거절과 사양이 모두 자식들 부담 덜어주려는 엄살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을. 요즈음 별일 없느냐고 물으시면 천하의 당신 자식 끄떡없다고 너스레를 떨 것을. 아프시면 알아서 병원가시라는 입 효도보다, 정기검진 미리 예약해 놓고 병원에 모시고 가는 발 효도 먼저 할 것을. 크고 거창한 것이 효도가 아니라, 당신 마음이 되어 생각하고, 상처받을 말 하지 않을 것을........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와 이별하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셨다.

    다음은 시인이자 수필가인 나의 여동생 미성이가 불교잡지 선으로 가는 길에 연재한 글을 여기에 발췌하여 싣고자 한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잠시 보살피며, 입원에서 임종, 장례, 49제 까지, 어머니를 보내는 감정의 흐름을 사색적으로 쓴 글이다. ‘숲속의 나날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내용 중 어머니와 관련된 부분만을 그대로 옮겨 싣는다.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우리 6남매의 마음이 모두 한결같을 것이므로..... 더불어 어머니가 임종하실 때까지 병원에 머무시던 두 달 여 동안, 우리 6형제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날마다 병실을 가득 채우며 그나마 어머니의 마지막을 외롭지 않게 보살펴드린 점을 정말 감사 한다. 어머니도 병석에서도 얼마나 흐믓해 하셨던가!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말에 우리의 슬픔을 맡기고 이제 우리는 더 쓸모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머니가 천국에서 바라는 것도 그것일 것이다. 

 

숲속의 나날들 6

    일찍이 석가세존은 불변의 진리를 설명하는 3법인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體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했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무상(無常), 세상은 괴로움의 바다라는 고(),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연에 따라 출몰할 뿐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이 세 가지 진리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고 사유해야 할 근본 명제다.

    특히 무아사상에서, 우리가 라고 인식하는 는 사실상 실재하지 않으며 다만 인연화합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라고 믿어버리는 애착이 가져다 준 그저 허망한 환()일 뿐이라는 가르침은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언뜻 이해가 어려운 대목이다.

   어머니는 그 대목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경계대로 부드럽게 잘 이해했다. 태어남은 인연이 모아짐이요 죽음은 인연이 다한 것이니 슬플 것도 무엇도 아니라고... 때가 되면 구름이 흩어지듯 가야하는 거라고... 그렇게... 죽음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초연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수행의 힘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수행력이 모범적인 불교도였다. 이론가가 아닌 실천적 수행자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삶의 막바지에 찾아온 힘든 병마를 달게 쓸어안았다. 자신이 아직 불교를 만나기 전, 젊은 날에 가족을 위해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느라고 닭의 목을 비틀어 죽이곤 하였는데 아마 그 과보가 이 삶의 끝에 찾아온 것 같다고 말하곤 하였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으므로, 아마 내생(來生)에 받을 살생의 과보를 좀 빨리 받고 끝내버릴 모양이라고, 그렇게 끊어서 짧게 말하곤 하였다.

   효심제일, 신통제일인 목련존자(부처님 제자 중 한 사람)가 아라한과(소승적 불교수행의 최고경지)를 증득한 성자의 경지에 오르고서도 삶의 최후엔 과거생의 과보를 갚느라고 거리의 불량배에 맞아서 생을 마감했다는 그 이야기, 어느 스님의 법문에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어머니는 한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초가을,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심하게 복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몸무게 38Kg, 나이 86세의 노인이 싸우기에는 위암 말기라는 병세는 지독하게 잔인하고 무도한 상대였다. 버석한 몸으로 마지막 기운을 짜내며 문안 온 자식들과 손자들을 마음의 눈에 새기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우주의 인과율에 따라 대자연의 도리에 맡기면서도, 귀여운 손자들과 자식들의 살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면 봄 안개 같이 아련한 미련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속성이리라.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때, 나는 멀겋게 어머니이의 깊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도무지 없는 거였다. 시간은 쉬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갔다. 이제 날은 더욱 추워지고 담요로 몸을 싸지 않고서는 밖에 나갈 수가 없는 계절이 되었다. 이미 겨울이 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숲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어머니와 헤어져야 할 시간도 목전에 와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섬망(임종 전에 찾아오는 환각상태)과 기면상태(계속되는 가수면 상태)와 코마상태(혼수상태)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견디기 힘든 허망함으로 경희대 교정의 숲으로 머리를 식히러 가면 어느새 나무들은 홍엽(紅葉)을 모두 떨구고 찬바람에 우들우들 몸을 떨고 있었다. 나무의 우듬지 아래로 겨울 텃새들이 저무는 오후를 이따금씩 우짖곤 하였다.

   이제 숲의 어디를 둘러봐도 불가항력의 조락만이 나무에서 숲으로 물결처럼 번져가고 있을 뿐, 창과 검으로 무섭게 무장한 작별의 사신이 나무를 뒤흔들자, 안간힘을 쓰며 겨우 남아있는 나뭇잎들은 속절없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만 하였다.

그 밤, 내가 꾼 짧은 꿈속에서 어머니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이제 가야겠구나. 라고 말하는 거였다. 꿈에서 깨어, 기면에 빠져있는 어머니를 확인하고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내가 생각한 것은, 중환자 상태로라도 괜찮으니 더 오래 어머니가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이었다.

   창밖은 깊은 밤이었고 새벽이 오기까지 그 밤은 정말이지, 너무도 길었다.

 

         숲속의 나날들 7

   창밖 멀리로 뿌연 연보라색 기운이 느껴졌다. 긴 동굴 속 같은 밤이 지나고 이제 여명이 오고 잇엇다. 진통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코마의 연속이었는지 어머니는 여전히 기면상태였다.

    나는 병실을 나와 응급실을 통해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갔던 선동호 쪽 숲길로 천천히 걸어갔다. 엊그제 내린 눈이 응달쪽에 제법 하얗게 드러나 보였다. 어떤 나무는 이미 나목이 되어 있었고 어떤 나무는 이미 퇴색해 버린 잎들을 아직 떠나보내지 못한 채 오들오들 몸을 떨며 불안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아제 가을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온통 겨울이 숲속에 가득 배어 있었다.

   돌아보면, 가을의 초입에 병원에 들어와 가을 한 철을 이 대학병원의 숲에서 숲의 나무들과 무엇인지 모를 그 무엇을 주고받으며 지낸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나무와 사람의 우정? ()의 교감? 상상력이 가져다 준 환상? 오랫동안 그 무엇이 무엇인지 사다리를 타고 무의식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아도 도무지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알 필요가 없는 저 너머, 저쪽세상, 다른 차원에서 보낸 형태 없는 선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병원의 숲속에서, 어머니와 내가 보낸 순간순간들은, 그대로 어디선가 보내져온 선물이었다. 이쪽 사람인 나는 선물을 보내준 존재를 굳이 알아야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숲속에서, 어머니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들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을 기억하리라. 두고두고 잊지 않으리라. 

   숨은 고요하고 순일하였다. 나무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었다. 머잖아 이쪽 세상의 에너지 하나가 나무들이 살고 있는 저쪽 차원의 세상으로 옮겨가게 되리라는 것을. 아침이 오고 있었지만 숲은 몹시 차가웠다. 크게 숨을 쉴 때마다 연기 같은 뽀얀 입김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곤 하였다.

   오전부터 상황이 최악이었던 어머니는 오후가 되면서 급하게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혈중 산소포화도 수치가 60으로 50으로 내려갔다. 휴일이었으므로 온 가족이 일제히 병실에 도착해 있었다.  

   가을날에 찾아온 여름 같은 뜨거운 날, 마지막 남은 한 줄기 여름의 잔상, 인디언 썸머를 어머니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준 초롱초롱한 의식에 빗댈 수 있을까? 오전 내내 기계에 의존해 숨을 쉬던 어머니는 자식들의 문안인사에 아이같이 천진한 미소로 화답하며 잠시 반짝 환자가 아닌 정상인처럼 표정이 돌아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뿐, 어머니는 두세 번 숨을 고르더니 이내 툭, 모든 것을 끝내 버렸다. 순식간에 이쪽세상에서 저쪽세상의 얼굴로 변하더니 몸에 온기는 간 데 없고 대리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이었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린 창에서 겨울 오후의 햇볕이 따사롭게 흘러 들어왔다. 나무와 숲은 숨죽였으나 숲에서 날아온 듯, 새 한 마리가 청아하게 노래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인연이 끊어지는 소리, 이렇게 만났던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지는가?’ 한 백년 후 쯤? 아니면 한 천년 후 쯤? 어디선가 우리가 다시 만난다 해도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인간관계로 만나질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서로 알아보지도 못할게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환생을 거듭하여 윤회한다 해도, 일단은 끝이었다. 그 뿐이었다. 간혹 꿈속에서 볼 수 있을까? 내 잠재의식이 만들어낸 그것, 홀로그램 같은 영상으로?

   가족 중 누군가가 어느 날 저쪽세상으로 가버린다는 것은 그런 느낌이었다. ‘중환자로라도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꿈속에서라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채로 그렇게 어머니를 보냈다. 차가운 대리석이 되어버린 어머니 곁에 앉아 눈을 감으니 어느 영화에선가 보았음직한 풍경이 온통 뇌리에 휘몰아쳤다. 울창한 푸른 숲이 거대한 바람에 흔들리고 숲은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끝간데 없이 저~쪽으로 몰려가는 거였다. 그리고 숲의 파도는 돌아오지 않았다. 

 

             숲속의 나날들 8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전라남도 옥과에 있는 성륜사에 모셨다.생전의 유언대로 어머니가 기도하고 수행했던 성륜사에서 천도재를 지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겨울 해는 무척도 짧았다. 서울에서 전라남도의 남쪽 맨 아래에 있는 무안의 선산까지는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기 때문에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도 하관식이 끝나고 나니 석양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붉게 지는 겨울 석양이 그처럼 선명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이제 영가(靈駕)가 된 어머니도 어디선가 보고 계실까? 서글픔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어찌해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의 하관식은 조촐하였다. 나는 잠시 그 장소를 피해 외면하고 먼 하늘가를 올려다보았다.

    어릴 적, 나는 가문의 선산이 있는 이 마을에서 잠시 자랐었다. 그 때 간간이 목격되던 아주 옛날 방식의 꽃상여의 행렬은 슬프면서도 뭐라 간단히 단정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슬픈 비감(悲感)과 함께 그것을 아우르는 미적(美的) 요소가 면면히 드러나 있었다. , 음악적 가락이 있었고 미술적 색채와 조형미도 있었다. 거기에 문학적 사설(辭說)과 춤사위까지 들어 있었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가족들의 슬픔을 마을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 가지며 가족의 힘든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는 듯한, 그래서 많이 슬프지만 거기에 노래도 있고 사설도 있고 장단도 있어 묘한 맛을 느끼게 해주던, 그것이 그 옛날 꽃상여의 행렬이었다.

   색색의 고운 꽃으로 한껏 멋을 부린 꽃가마에 망자를 태우고 그것을 어깨에 멘 마을 상두꾼들은 앞에서 요령을 흔들며 선창(先唱)하는 상두머리의 상두가(喪頭歌)가 끝나면 뒤에서 후렴을 하며 보폭을 맞춰 애잔한 행렬의 미감을 고조시키곤 하였다. 꽃상여의 뒤로는 망자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인연의 끈이 길게 이어지고 그 인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슬픔을 함께 하며 상여의 행렬을 따라가곤 하던 것이었다. 그 인연 줄은 길고도 길었었다는 기억이 난다.

   아주 오래 전 어릴 적 기억인데 잊어버렸다가 다시금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현대화의 조류에 묻혀버린 지 오래지만, 그래서 어디 영화에서나 운 좋게 한 번쯤 볼 수 있을 뿐인 전통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 보았던 그 꽃상여의 행렬을 어머니의 장지에서 잠시 떠올려 보았던 것이다.  

   어둑해진 초저녁 길을 달려 성륜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옥과읍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갈 땐 산길 양옆으로 녹지 않은 눈들이 하얗게 밤길을 밝혀주었다. 겨울 숲과 나무들 사이로 조용하고 청청한 공기가 느껴졌다.

   우리가 많이 늦게 도착했는데도 젊은 스님 한 분이 우리를 기다리며 맞아주었다. 스님의 안내로 극락전에 영정을 모셔놓고 반혼제(返魂祭)를 올렸다. 반혼제는 이제부터 49일 동안의 천도재를 여기서 지내게 되었다는 것을 망자의 영혼에게 알리고, 부처님과 불보살님과 시방 여러 제신 앞과 명부에 고()하는 의식 같았다.

   어머니께 재배(再拜)를 올리며, 정말 어머니가 이제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버렸다는 서글픔에 목이 메었다. 이제 세상 어디에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청화스님이 주석하셨던 성륜사의 오랜 신도였다. 일찍이 불교와 만났던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광주에서 멀지 않은 곡성 태안사에 청화스님이 주석하실 때부터 스님을 스승으로 마음공부를 시작하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청화스님이 성륜사를 창건하고 주석하시면서 성륜사에 나가며 불교 수행에 매진하셨다. 20대 후반부터 서울살이를 했고 늦은 나이에 불교와 만났던 나는 청화스님을 몰랐지만 어머니를 통해서 그분의 면모를 짐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스님의 수행일화나 기품 같은 것을 곧잘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이 세상에서는 존경해마지 않는 스승과 신도로 인연 했던 그분들은 이제는 고통 없는 그곳, 마음의 고향에서 맑은 마음과 마음들로 만나고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성륜사의 밤은 깊어가고 산사의 적요로움이 우리를 편안하게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어머니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보내고 밤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매서운 겨울이었고 내 마음 속에서 숲은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숲속의 나날들 9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문을 밀어 어머니와 이별하고 돌아온 후 숲에 가 보았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숲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하늘을 덮었다. 여기 저기 어머니와 내가 머물렀던 곳들에 생전 모습이 어른거려 한참동안 애를 먹었다. 시간이 자꾸 뒤죽박죽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어머니의 부재가 현실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도 전화하면 어머니가 내 딸하며 반갑게 전화를 받을 것만 같았다. 여기서 좀 더 진행하면 환영과 환청을 겪게 될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나 스스로를 추스르고 제자리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와야만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것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차이이고 법칙인지도 몰랐다. 

   매섭고 쓰라린 겨울바람들 켜켜마다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며 나누었던 대화들이 묻어났다. 주로 어머니는 말하고 나는 말없이 듣는 형식이었다.

저거 봐라, 저 철쭉이 내년 봄에 꽃을 피우면 얼마나 예쁠까나?”

내가 저 꽃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모르겠구나.”

옛 어른이, 산다는 것이 잠깐이라더니 내 살아보니 과연 그렇구나.”

내가 간 뒤에도 너희들은 지금처럼만 서로 우애하고 살아라.”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지난 여름, 숲속 나무들 아래에는 큰 개미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어머니는 늘 휠체어바퀴에 개미들이 깔리지 않게 하려고 나에게 주의를 주곤 하였다. 그런 소소한 기억들이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추억이 되어 온 겨울 숲을 가득 메웠다.

   오랫동안 인기척 없는 적막한 겨울 숲에 그렇게 서 있었다. 지난 여름, 친구가 되어주던 도도와 라라도 보이지 않았다. 토끼도, 여러 가지 색의 닭들도 하얀 개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참새가족과 까치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동안 내가 와보지 못한 사이 그것들도 어디로 가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가축의 주인이 추위를 걱정해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지 모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엇이든지 살아 움직이는 것을 찾아 말을 걸어보고 싶은데 모조리 경직된 추위와 무채색의 침울함뿐이었다.  

   얼마동안 적막한 숲을 응시하며 그대로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그러다가 눈을 감은 채, 고요한 내면의 세상으로 내려갔다. 거기, 외물의 움직임이, 외부의 소리가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 않는 깊은 고요의 세상이 있었다. 어찌 보면 절대고독의 세계 같기도 한, 다시 생각해 보면 뼈저린 외로움 같기도 한, 그런 오묘한 세계. 나는 지금 의식 속에서나 무의식 속에서나 무척 외로운 모양이었다. 피붙이라는 것이 주는 영향력은 그처럼이나 강한 것인 모양이었다.

   어머니 사 후, ‘티벳 사자(死者)의 서라는 책을 가끔 읽었다. 그 책에 의하면, 사람은 세 가지 형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육체가 그 하나이고, 다음은 육체와 꼭 닮은 유체가 그것이다. 유체(幽體)는 투명한 비물질로 구성되어 있어 그 형체만 존재한다고 한다. 그 다음이 생명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영체(靈體)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유체는 사람이 삶을 마감하고 죽게 되면 육체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영혼쯤으로 설명된다. 살아생전의 그 사람의 모습과 꼭 같은 복사체이며, 비물질로 구성되어 그 형체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다고 한다. 흔히 우리는 그것을 유령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유체는 다소의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대략적으로 다음 몸을 받기 전 49일 동안만 존재하는 유한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중음신으로 존재하는 그 기간 동안 유체, 즉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면 영가는 깨우침을 입고 더 진화되어 좋은 몸을 받거나 해탈에 이르기도 한다고 티베트의 경전은 가르친다.

   숲을 걸어 나오며 어머니의 천도재를 필히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어머니도 유체의 형태로 우주 어딘가에서, 자식들이 정성으로 베풀어줄 49일 천도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진정 그러할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달력을 찾아 시간을 맞추었다. 아름다운 수행자, 청화스님의 향기가 사라지지 않을 절, 성륜사가 불현 듯 마음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숲속의 나날들 10

    전라남도 옥과에 있는 설령산, 눈 내리는 그 겨울산에 나는 서 있었다. 드문드문 흰 나비 떼가 날 듯 눈송이는 한가롭게 겨울바람에 나부꼈다. 눈이 내리는데도 남도 특유의 따뜻함은 사라지지 않은 채 먼 곳에서 온 슬픈 여행객을 말없이 가만히 품어 주었다. 눈송이들은 실비단처럼 가볍게 날아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기도 하고 그대로 땅 위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앉기도 하였다.

   뼈만 남은 나무 위에 앉은 애잔한 눈송이와 그것들을 애써 비켜가며 다독이는 겨울바람의 노래가 오묘한 화음이 되어 내 가슴에 울림을 주고 사라져 갔다. 겨울산에 서면 이런 낙도 쉽게 느껴볼 수가 있다. 겨울산의 이런 아름다운 화음들은 이내, 세속에서 걸어들어온 속인의, 슬픔으로 응어리진 마음마저 녹여버린다.

   어느 시인은 말했었다. 겨울산에 가면 끝도 없이 가슴속으로 울게 된다고. 그리고 마음은 얼음 한 덩어리가 되어 한없이 맑아져서 돌아온다고.

    겨울산의 정적 속에 나를 맡기고 있으면 어느 순간 우주의 마음 그대로가 내 마음이 된다. 인간인 내가 우주 속으로 깃털처럼 무게도 중력도 없이 스며들어 간다. 그리고 우주는 내 안에서 순일하게 움직임을 멈춘다. 감미롭고도 평온한 이 시공을 고독이라고, 절대고독이라고 달리 불러도 좋으리라.

   더는 내려놓을 것도, 탐닉할 갈애(渴愛)도 사라져버린, 얼음같이 차가운 순수함에 가 닿을 수 있다면 누군들 고독에 물들지 않으랴!

    뼈만 앙상한 나무들은 저마다 각각 키가 큰 것도 있고, 유난히 작은 것도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키가 큰 나무들은 저희들끼리 팔을 벌려 바람막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 키가 작은 어린나무들을 보호하고 있다. 일순 바람이 불면 키 큰 나무들은 후둑후둑 몸을 흔들어댔지만 그것들 아래 작은 나무들은 큰 흔들림 없이 평온을 되찾곤 하였다. 겨울나무들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안고 또는 의지하며 겨울을 이겨내고 있었다. 매섭고 쓰린 겨울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무들이 내게 말했다.

   우리 형제들은 그 동안 여섯 번,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를 지냈고, 오늘은 회향의 날이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어머니는 이제 오늘로서 우리들과의 인연을 확실하게 끊고 새로운 세계로 이동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사망 이후 존재했던 유체마저도 이제 소멸되고, 이 세상에서 행했던 업식(業識)만을 가지고 우리는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미지의 공간으로 재탄생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느꼈든 그렇지 못했든,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천도재 기간 동안 어떤 방식으로든 오묘하게 에너지를 주고 받았을 것이라는 게 나의 확신이다.

   “형성된 모든 것은 반드시 무너진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그렇게 설하셨다. 어머니는 이제 물질로 형성되었던 몸과 오온의 정신마저도 모두 소멸될 것이었다. 다만 또 다른 인연이 일어나 생전의 업에 따라 재생되긴 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우주의 법칙을 믿었지만 그래서 조금 덜 슬펐지만 다른 형제들은 거의 모두 단멸을 믿었기 때문에 천도재를 지내오는 동안에도 내내 슬픔에 잠겨 있었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그에 상응하는 불가사의한 현상도 따라 나타나는 것인가? 천도재 기간 동안 형제 중 누군가는 어머니의 영단에서 어머니가 밝게 웃으며 환한 빛이 비추는 곳으로 걸어가는 비몽사몽을 경험하였고, 또 다른 형제는 어머니가 젊은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꿈에 선명하게 보기도 하였다.

   언젠가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었다. “다음 생엔 꼭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어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구나. 요번 생엔 공부와 인연이 닿지 않아 늘 궁금한 것이 많아 답답했었다.”

생체의 모든 기는 서로 파장으로 연결되어 통하고 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는 생각에 이제 나는 확신이 섰다. 그리고는 짐작했다. 어머니는 생전의 어머니의 바람대로 다시 한국에 태어나 학자가 되어 세상을 위해 공헌하게 되리라고. 사실 어머니의 삶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하루의 대부분을 경을 읽고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염불하며 보냈으니 그 습()이 철두철미한 공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겨울바람 부는 설령산의 성륜사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이제 진정 어머니와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지스님의 위엄 있고 울림 있는 목소리에 실려 온 영가법문은 머나먼 태고의 음향처럼 우리들을 숙연하게 하였다. 어머니도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한 마음이 되어 어머니를 위한 이 영가법문을 듣고 계시리라……. 마음 한편이 다시 아려왔다.

 

숲속의 나날들 11

    <티벳 사자의 서>는 영가, 즉 유체의 여행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생을 마치면 육체에서 분리된 유체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흰색, 검정색 등의, 유체 각자 나름의 고유한 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또한 생전에 쌓은 업()의 정도에 따라 0.6g38g 정도의 각기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고 한다. 유체 각자가 지니게 되는 이 고유한 색깔과 무게는 장차 다시 태어남을 갖게 될 여섯 개의 윤회세계를 선택하게 되는 결정적 기준이 된다고 한다.

   더불어 유체는 중음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경험을 거치면서 명부에 다다르고 자신이 생전에 쌓은 업에 따라 심판을 받기도 하며 여러 과정을 거친 후에 자신이 다시 태어나게 될 여섯 세계 중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다시 재탄생의 길을 찾아 돌아온다고 한다.

   이때에 여섯 가닥의 빛줄기가 자신을 향하여 서서히 빛을 비추기 시작하는데 흰색 빛은 천상계로부터 온 빛이고, 녹색 빛은 아수라계로부터, 노란빛은 인간계로부터, 푸른색 빛은 축생계로부터, 붉은빛은 아귀계로부터, 검은색 빛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빛이라고 한다.

   이때 영가 자신의 몸체의 빛과 외부에서 비추어져 오는 빛이 같은 색깔의 빛으로 물들며 그 빛에 대한 강한 동경과 애착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영가는 다시 자신의 업과 상응되는 세계로 진입하여 들어간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여행 중에 영가가 겪게 되는 수많은 체험들은 사실 영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한다.

   아무튼 영가는 재탄생으로 향해 가는 이 순간순간들에 과거의 자신의 악행이나 나쁜 업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고 깊이 뉘우침으로서 나쁜 업을 제거하고, 과거에 자신이 지은 선행이나 좋은 업을 기억하여 그 일에 대해 명상함으로써 맑고 밝은 마음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영가시여,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듯 인연 따라 모인 것은 인연 다 하면 흩어지니 오고감이 모두 인연인 것을 영가님은 아셔야 합니다. 영가께서는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애착을 놓으시고 무거운 짐 모두 벗고 무명업장을 모두 밝히시고 청정하신 마음으로 극락세계 왕생하십시오, 나고 죽는 생사윤회가 아지랑이 같이 허망한 것이니 이 세상과 육친의 정에 애착을 버리셔야 합니다.

   물이 얼어 얼음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 삶과 죽음도 그러하니 좋은 인연만 간직하고 지극한 청정심으로 아미타불 극락세계 태어나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꿈과 환이요, 끝이 없이 이어지는 중음계의 경험들도 모두가 사실 아닌 꿈인 것을 영가님은 아셔야 합니다.“

    성륜사 무상스님의 영가를 위한 엄숙한 법문은 낮게 울려 조용히 물결쳐 퍼져 나갔다. 어머니를 향한 스님의 간곡한 당부는 여기 남은 우리 형제들의 마음을 녹이고 위로하여 한결 슬픔을 가볍게 해 주었다. 영가법문이 법당을 숙연하고 따뜻하게 감싸는 동안 간간히 겨울바람이 가볍게 문고리를 흔들었다. 영가법문이 흐르는 법당은 마치 고요한 명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없이 차분하였다. 스님의 격이 있는 중저음 목소리에 실려 오는 영가법문은 전에 어디서도 들어본 바 없는 아름다운 울림이 있는 법문이었다. 어머니도 더 할 나위 없이 만족한 감동을 안고 청정한 차원의 세상으로 나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머니를 위한 천도재를 회향하고 우리는 각자의 일터로 돌아왔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다가 사라지는 한 평생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뭔가 시간을 낭비함 없이 부지런히 수행을 해야겠다는 다짐이 새삼스럽게 밀려왔다.

   초가을에 병원으로 가고 눈 내리던 겨울 어느 날 그렇게 작별하고, 윤회를 믿었기에 어머니와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였고 그래서 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겨울밤을 뜬눈으로 앉아 있었다.

춥고 긴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의 숲에서 나무들이 일제히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제 곧 봄이 올 거야. 잎이 진 자리에 새순이 돋을 거야. 꽃이 진 자리에 또 꽃이 필거야. 우리는 늘 그렇게 인연의 법칙 속에 머물고 있는 거야.”

 

          정든 광주에서 경기 분당으로 이사한 퇴임 6년차

     2014년 갑오년에도 지난해와 별다름 없는 연간 계획을 세우고 연수에 몰두하였다. 중심 활동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사진 활동은, 선종백 교수님의 요청으로 교수님이 옮겨 가신 학교인 서영대학교 평생교육원 사진 주간반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월요 사진회, apc뉴스, 광주매일 등 사진동호회 출사와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금년에는 가능한 한 다수의 공모전 출품을 목표로 잡고 사진 활동을 열심히 하려고 마음먹었으나 게으름으로 실천하지 못하였음을 깊이 반성하며 다음 해에 다시 본격적으로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118일부터 9일까지 APC 뉴스 기자 연수 과정을 마치고 보수없는 명예직인 출판 부장으로 승진하는 기쁨도 맞보았다. 1120일에는 제8회 광주광역시 사진 대전에 출품한 나비처럼이 입선하였고, 1118일에는 제6회 광주매일신문 전국 사진 대전에 출품한 엄마와 허수아비가 입선 하기도 하였다. 월요사진 동호회에서는 1013일부터 16일까지 회원전 '야시장 이야기', 121일부터 5일까지는 사진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전 광주의 나무 이야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14 광주 사진대전 입상작- 나비처럼

 

    골프 활동에서는 여전히 광육 골프회, 청솔회, 빛나무회, 이화회, 김선호 부부 등 정기모임 참석과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친지들과의 회동으로 우정을 나누기도 하였다. 추위를 피해서 118일부터 23일까지 지난해부터 계획되어 오던 이화회와의 태국 치앙마이 골프투어(GSJ 여행사)를 부부가 함께 다녀왔고, 등산 활동은 광육 등산회에 참여하였으나 사진 출사 핑계로 결석이 많아졌다. 대신에 우등관광을 통하여 옛길걷기를 하여 건강도 챙기고 사진도 찍는 계기로 삼았다.

  서예 활동은 학생문화회관 강좌를 수강할까? 하였으나 아무래도 시간 부족으로 태만하게 될까? 싶어, 등록은 하지 않고 자가 연수로 바꾸었다사군자 활동에서는 광주학생문화회관 사군자반이 부활되어 등록할까? 하였으나 사진 활동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접었다.

  가정적으로는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도 아들 태훈이와 딸 나영이의 둘째 손주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조급함이 있다.

  131일 구정에 어머니의 49제가 끝났다. 어머니께서 이제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는 슬픔 보다는, 장남으로서 책임을 다 할 수 있었다는 이 안도감은 무엇일까? 아쉽지만 장수하셨고 원하시던 대로 천도재까지 정성스럽게 지내드렸으니 이제는 장남으로써의 책임감에서 잘했든 못했든 벗어나는구나, 하는 일종의 해방감이었을까? 어떻든 어머니는 좋은 곳에 가셨을 것이고 아무리 그리워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문득 생각이 나는데, 나에게 신기한 일이 하나 있다. TV 연속극 드라마를 보다가도 울컥하는 내가, 죽음에 대한 슬픔은 없는 건지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할머니의 초상 때, 할머니의 상여가 나가는 날, 동네에 사시는 어른들 대부분이 눈물을 닦고 계시는데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아 몹시 겁이 나고, 답답하고, 부끄럽고, 걱정이 되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 보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아버지, 사촌 매형 등 가까운 사람들의 초상 때도 울어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역시 어머니 초상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슬픔이 복받치는 입관식에서도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너무 슬퍼서 감정마저 말라버렸던 걸까?

  모친을 떠나보낸 슬픔 속에서도 살아있는 사람은 산다고, 이미 약속된 일이라는 핑계로 23일부터 7일까지는 전직 교장 후배인 정 반석 장로님의 필리핀 선교활동에 동행하였다. 원주민들의 가난을 피부로 느끼고 이들을 위한 선교활동도 지근거리에서 파악하고 감동을 받았다.

그 사업에 지원의 손길을 보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귀국하고서는 어느새 잊고 말았다52일부터 3일간 고교 친구들의 모임인 영산회의 속리산 모임에 참석하여 고향 친구들과의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5월과 7,9월에는 시청에서 실시하는 무료강좌인 정보화 교육으로 포토샾과 블로그, 카페 꾸미기 교육을 이수하였고, 이를 계기로 주제 사진으로 쓰는 일기부제 소광선생님 이야기로 내 blogdaum에 개설하여 사진과 글을 올리고 있으나 방문자가 많지 않아 자기만족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평소와 다름없는 퇴임 후 활동을 계속하던 중, 7월은 나에게 마의 계절인가? 723일 광육 등산회의 무등산 등산을 화기애애하게 마치고 다음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기상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파트 지하 헬스장의 새벽 운동이 달갑지 않은 느낌이 왔다. 그래도 그냥 이기고 내려가서 평소와 다름없는 운동을 하였다. 물구나무서기 운동 후 약간의 두통이 느껴졌으나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였다. 오후에 들어서는 두통이 심해지고 어지럼증이 심해지면서 구토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다음날 새벽, 동생 원이의 조언에 따라 전남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고 검사를 받게 되었다. 검사 중에도 두통, 어지럼증, 구토는 더욱 심해졌고, 끝내는 혈변과 혈토를 하는 것이었다. 결국 화장실에서 졸도, 응급실에서 또 다른 응급사항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때까지 방치 상태로 놓아두었던 나에게 그때서야 간호사의 손길도 다가왔고, 검사 속도도 빨라졌다. 새벽 6시에 입원한 환자를 밤 11시에 끝난 검사 결과, 머리에는 이상이 없고 이석증이라는 결론으로 뇌파 검사실에서 이석증 치료를 간단히 받고 증상이 완화 되었으나 신통치 않았다.

    문제는 구토과정에서 식도와 위 사이가 찢어져 혈변과 혈토를 한 것으로, 위 내시경 치료 등 8일간의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생 원이의 역할이 나를 살렸다. 금요일에 입원을 했으니 휴일이 겹쳐 찢어진 위를 묶어야 하는 치료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는데, 원이가 후배 의사에게 전화를 해서 토요일인데도 출근하여 탈 없이 치료받을 수 있게 조치하였던 것이다. 휴일이라는 이유로 전문의사가 아니고 당직 인턴 수준의 의사가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환자를 개 취급하는 대학병원, 이곳이 어지럼증 검사하는데 17시간이 걸렸다면, 세계적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의료 수준을 믿을 수 있겠는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늘 도움만 받고 보답도 못하며, “고맙다는 말로 때우는 형이 부끄러울 뿐이다. 늙으면 발병도 죄인가? 알량한 자존심으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견뎌 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위문해준 최윤창 교장 부부, 헤드빅 성당 교우 부부, 아들의 바깥사돈의 위문에 감사드린다. 연락을 받자마자 밤을 세워 급하게 달려와 도움을 준 딸 나영이가 너무 고마웠고, 다음 날 찾아 준 아들 부부에게 감사한다.

    퇴원시에는 사위가 와서 도움을 주었으니 요즈음 유행어인 아들보다 딸이다.’라는 말이 맞는 것인가? 이러한 우환에서 얻은 지혜는 무리하지 말 것이며, 어지러움 증상에는 이비인후과 방문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만한 고통으로 마무리 지어준 하느님께 감사한다. 역시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기뻐해야겠다.

   이런 엄청난 과정을 혼자 감수해 낸 아내가 이제  형제자매와 자식들 곁으로 가자는 성화에 못 이겨 승낙 하고집을 부동산에 내놓기로 하였다.

   98일은 추석이다. 윤달 때문에 올해 추석은 다른 해에 비해 빨리 왔다. 나에게는 어머니께서 계시지 않은 첫 추석이다. 예년과 다름없는 준비를 한 추석이지만, 어머니가 타계하시어 계시지 않은 추석이라서 형제들이 한 명도 오지 않는 쓸쓸한 추석이 될까? 걱정이 되었다우려가 현실이 되어 한 명의 형제도 참석하지 않은 외로운 추석이 되었다.  무안군 일로면 죽산리 소재의 고향 산소에 우리 가족끼리만 조촐하게 성묘를 하고 왔다. 쓴소리의 카톡이라도 날릴까 갈등하다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는 생각이 들어 참기로 했는데 오후에서야 방원이 내외, 원이 내외가 방문해 주어 알 수 없는 다행함과 기쁨을 맛보았다. 조상의 복이 그들에게 내리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결국 그러려니 하고 살자는 생각은 잘 한 일이 되었고, 나에게는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진리가 되었다. 앞으로는 꼭 이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그것이 이런저런 성인병이 있는 나의 건강에도 약으로 작용할 것이다. 너무 급한 성격은 여러 가지로 이로울 게 없다는 사실을 또 다시 확인하였다. 이제 나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추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며 이렇게 살리라.

   천주교를 통한 종교 활동은 나의 삶에 있어 중심이 되어 있기는 해도, 크게 내세울만한 활동은 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다니고 있는 쌍촌동 성당 33주년 기념일인 '14. 10. 26일에 모범신자 33인을 시상하는 과정에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기쁨보다는 부담이 되었으나 성당 행사시 사진 봉사활동이 여러 교우들의 눈에 들었었나 보다. 앞으로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기쁜 마음으로 받기로 하였다. '주님, 저에게 능력과 지혜와 성실함을 내려 주소서!'하고 기도하였다.

  집을 부동산에 내놓은 지 3개월 만인 108집을 보러온 젊은 부부가 당장에 계약을 하자고 하였다. 가 계약금으로 3백만 원을 입금하고 13일에 정식 계약을 하자고 하였다. 당일 부동산에 갔더니, 외국에서 입국하는 과정에서 외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3일만 여유를 달라고 하여 그렇게 하시라고 하였다. 또 당일 날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직장이 서울로 결정되었다며 계약 및 계약금 포기를 선언하는 거였다.  

    우리 쪽에서도 너무 갑작스럽게 일이 진행되어서 난감한 문제들이 있었다. 우리가 이사 갈 판교 집의 리 모델링 관계로 시간이 너무 촉박하였던 것이다. 계약이 취소되어 시간도 여유가 있게 되었고, 가 계약금 3 백만 원의 불로소득까지 생겨 잘 되었다 싶었지만 뒷맛은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 일로 인하여 복잡다단한 세상을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명령은 이사를 가라는 쪽이었는지, 우리가 요구한 금액 그대로 광주은행 관사로 팔리는 행운까지 얻어, 115일 계약서에 날인을 하고 118일 드디어 경기 성남 분당구 운중동 LIG 건영아파트 403302호로 이사를 하게 되었으니

   첫째, 늙은 아내의 간곡한 요청을 이제는 들으며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

   둘째, 판교 집 세입자의 만기가 다 되었다는 점,

   셋째, 광주 집이 시장 관사로 입주할 만큼 좋은 아파트이긴 하나 지금 팔지 않으면 제값 받고 팔기는 어렵지 않겠나 하는 생각,

   넷째, 자녀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나이에 자식 곁으로 가서 서로 부딪치면서 적응해 가야지, 쇠약해져서 전적으로 자식 도움이 필요할 때 가는 것은 부모자식 간에도 예의가 아니겠다는 생각,

   다섯째는, 지금까지의 내 삶이란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내 마음대로의 삶이었다면, 이제 가족 중심의 삶을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에서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서울 생활은 갑갑하고 위축됨을 감수해야 했지만, 서서히 초,,, 대학 동창들의 모임에 참여해 가고 있으며, 성당을 통한 종교 활동, 복지관을 통한 연수 참여 활동 등으로 점점 자기 페이스를 찾아 가며 살고 있다.

또한, 변화에서 오는 색다른 삶의 여유도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다.  

 

서울 생활에 쉽게 적응한 퇴임 7년차

    아들 태훈이와 딸 나영이의 둘째 손자 탄생이 조급해지는 2015년 을미년이 되었다. 금년에는 주거지가 광주광역시에서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판교로 바뀐 점이 크게 달라진 점이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 하니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해서 남은 여생 의미롭게 살아보고자 노력중이다.

특히 이곳 에서는 이미 인생은 하느님의 뜻대로 되어 지는 것이라고 간파한 것처럼 종교 활동에 의미를 두고 생활함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이사한 그 날부터 판교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입교한 즉시, 레지오마리에 샛별 쁘레시디움에 입단하여 부단장으로 활동하는 화요일, 주일미사 참여를 위한 일요일, 운중동 주민센타의 교육프로그램 참여를 위한 월, 금요일 서예와 수요일의 사진강좌와 출사를 위한 시간으로 고정하였고, 딸과 아들 부부가 맏벌이 임을 감안하여 친손주와 외손주 돌보는데 많은 시간을 투여하게 되었다. 예전에 나는 지인들에게 나는 노후에 손주 돌보는 일일랑 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었는데....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임을 실감하며 산다.

    우선 중심 활동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사진 활동에서는 가천대학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운중동 주민센터 사진반에 등록하여 공부하고 49일에는 학생 전원이 경주 출사를 다녀온 것을 필두로 무박 1일 여행사의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월 1-2회의 출사를 다녀왔다. 광주에서의,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사사모회, 월요 사진회, apc뉴스, 광주매일 등 사진동호회의 전시회에는 참여하되 월례, 분기별 출사에는 참석이 어려웠다. 특히 금년에는 개별적으로 가능한 한 다수의 공모전 출품을 목표로 잡고 사진 활동을 열심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게으름으로 다섯 곳에만 응모를 하게 되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인맥이 판치는 예능계의 특성상, 성과를 얻지 못하였음을 감안하여 사진 활동의 흔적은 잘 보존하기 위하여 나의 불로그 활동은 계속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만족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다분히 방문객 수를 늘리는 노력을 해야 되겠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515일 제16회 향수사진 전국공모전에 출품하여 망태작업으로 입선하였고, 612일에는 제5회 성남 전국 사진 촬영대회에서 태권소년으로 입선하였다. 91-5일까지 월요 사진동호회원전에 참여하였으며, 출품했던 작품들은 초등학교 친구들인 고 성일,이 도수에게 선물하였다. 작품의 가치를 알기는 하는지? 97일부터 10일까지는 한국사진 문화잔흥회의 광주의 나무라는 주제전에 참여하여 작품은 광주광역시에 기증하였다.

    1114일부터 15일까지 강원도 태백예술문화회관에서 APC뉴스 기자 연수 과정을 마쳤으며 1120일에는 제8회 광주광역시 사진 대전에 출품할 예정이었으나 비용도 많이 들고 수속도 복잡하여 취소하고, 1118일에는 제7회 광주매일신문 전국 사진 대전에 출품하여 고양 꽃 축제로 특선 상을 수상하였다. 그래서 광주매일신문 전국사진대전 추천 및 초대자가가는 되겠다는 목표 세웠다. 여유가 생기면 대한민국 사진대전까지는 넘겨다 볼 생각이다.

2015년 제5회 광주매일 사진대전 특선 '고양시 꽃 축제

  그동안 동호회로 움직이던,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사사모가 한국사진예술문화진흥회라는 법인체로 바뀌면서 이사로 취임하는 영예를 얻었고, 97일부터 10일까지 광주 U대회 주제전을 열었는데 작품을 전시하고 주최측에 기증하였다.   

   골프 활동에서는 추위를 피해서 119일부터 23일까지 지난해부터 계획되어 오던 이화회와의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안 골프투어(투어뱅크 여행사)를 부부가 함께 다녀왔다. 광주의 광육 골프회, 청솔회, 빛나무회, 이화회, 김선호 부부 등 정기모임 참석은 고려하고, 서울에서의 활동으로 바꾸어 대학동창인 서울 광6 골프회와 처제들과의 월 1회 정도의 라운딩을 하기로 하였다.418일 처제들과 동여주 골프장 라운딩 광주의 이화회와의 해외 골프투어가 무산됨에 따라 대신 서울 광육 골프회와 1121일부터 10일간의 태국 다이너스티 골프장 연수를 직영으로 다녀왔다.

  등산 활동은 서울의 광육 등산회에 결석하지 않고 참석하여 서울 지리도 익히고, 출사를 겸하였다. 116일에는 남산을 올랐으며 227일 불암산을 광주에서 하던 옛길걷기는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고, 서울과 경기의 곳곳을 찾아다니며 사진 활동을 계속하는 것으로 건강을 위한 걷기로 대치하였다. 서예와 사군자는 자가활동으로 대처하였다.

  18일에는 40회 결혼 기념일을 맞아 자녀들의 축하금을 받았으며 10일에는 테훈이 결혼 기념 식사자리를 만들어주었다 18일에는 광주 일광회와 쌍마회에 참석했으며 26일에능 조카 성호의 결혼식에 참석하였으며 7일에는 일로에 구정 성묘를, 14-15일은 문일 부부와 동해안 속초 관광을 23일 광주 9.1회 참석 31일에는 초딩 모임을 4일에는 광주 사사모 법인 등록 자료제출 12일에는 광주369회 와 주월 씨 본회에 참석 21일에는 태훈 나영 가족과 서천 동백 쭈꾸미 축제에 

    46일에는 막내 동생 원이의 점심 주선으로, , 여산, 방원, 미성이가 만나 점심을 함께 하고 봄꽃이 만발한 경희대학교 교정을 거닐며 정담을 나누었다. 실로 형제애를 느끼게 하는 잊지 못할 행복한 날이었다. 막내 원이에게 감사를 드리며, ‘오름차순으로 계속하자일렀으니 다음을 기대해야겠다. 특히 이 자리에는 외가 형님인 창진이 형수님께서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었다. 하늘에서 부모님께서도 우애하는 우리 형제들을 내려다보고 기뻐하셨을 것이다.

  51일부터 3일까지 고교 동창 고향 친구들의 모임인 영산회에서 태안군 안면읍 중장리 693번지 율포길을 걷는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도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 사진찍기에 빠져있던 나는 안면도 빛의 축제사진을 찍고 싶은데, 피곤한데 멀다며 계획대로 하지 않고 그 장소에 가는 것을 포기하는 친구들에게 싸잡아 독설을 쏘아 붙이고 우리 부부만 다녀와 배려 없는 아집을 보였기 때문이다. 69일부터 14알까지 초등학교 서울 동창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고 625일에는 광주 9.1회에 참석하였다.

   74일에는 계획대로 나의 형제들이 도봉산 등산을 하였다. 거처를 완전히 서울로 옮기고 처음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모든 것이 생경했지만 이제는 비교적 적응이 잘 되고 있다고 자답해 본다.

오랜 터전이었던 고향 광주지역을 벗어나 한양 깍쟁이라고 예전부터 전해오는 서울 살이를 시작할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것이 한갓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자식들과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오니 뭔가 우선 마음에 안정감이 생기고 이웃사촌이라는 말처럼 사람들도 사귀고보니 모두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자식들이 부모를 배알하는데 기동력이 있어서 좋고 손쉽게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멀리 있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없어서 마음이 항상 가볍다. 더구나 형제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면 어쩔 수 없이 소원해 질 경향이 많은데 같은 지역에 살고 보니 아무리 바쁜 서로의 일상 속에서도 쉽게 만남의 시간들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문득 평소 해오던 카톡의 패밀리 방에서 가끔 만나, 실행을 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순식간에 의견이 모아져 지난 6월 초에는 청계산을 1차로 하여 가족 등산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모임에다 특히 산행이라는 전제가 있어서, 어떨까 걱정했는데 성과는 기대를 초월했다. 형제들끼리 서로 오순도순 흙을 밟고 산을 오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마에 땀방울은 송글송글 맺히고 무언가 말 할 수 없는 의미로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옛날부터 손가락도 모두 아롱이 다롱이라 하지 않았는가? 서로 다른 개성과 인생관, 가치관을 지닌 형제들이 서로 마음을 모으고 배려하며 산을 오르는 일은 기쁨이며 행복이었다. 어떤 가정이던 그러하겠지만, 자랄 때는 한 솥밥을 먹으며 한 부모 밑에서 철없이 자라다가 어른이 되고, 서로의 인생을 각자 살다보면 때로는 서로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자주 만날 수 없어 아쉽기도 한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감정을 경험하며 살아왔다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어 형제들을 만나 산행을 하다 보니 참으로 감회가 컸다. 뭐랄까, 서로가 자신의 배를 타고 먼 대양을 항해하다가 바다가운데에서 함께 만나 그동안의 회포를 푸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렇게 뿌듯한 기분으로 청계산을 내려와서 막걸리에 도토리묵을 시켜놓고 몇 순배가 오고가니, 어릴 때 뒤엉켜 뛰놀며 자라던 시절이 상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답고 푸근한 마음이 되어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오후 해가 짧게만 느껴진다. 이런 것이 가족애며 사람 사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청계산 산행 때, 즉시 72차 모임을 약속했고 그곳은 도봉산이었다. 우리가 잡은 도봉산코스는 포대 능선 정상을 지나 Y계곡을 넘어 신선대로 택했다. 생각보다 난코스였고 여름날씨라 더 쉽지 않았지만, 산행을 다녀온 지금 내 마음은 감동 바로 그것이다. 자운봉 코스가 군대 군대 급경사도 심하고 산 자체가 바위산인지라 뭔가 오르는 느낌이 야성의 맛을 느끼게 하였다. 만월암을 지나면서부터는 악산의 깊은 속살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묘미 또한 대단하였다.

    포대능선을 지나고 드디어 Y계곡을 지날 때는 심한 울렁증과 다소의 현기증이 엄습하였다. 도저히 발을 쉽게 내디딜 수 없는 깎아지른 바위들 사이로 철봉대 하나에 매달려 가는 등산은 내가 지금껏 해온 등산 중 최대의 난코스였다. 그런데 동생들이 일일이 손을 잡아주고 하나하나 발을 잡아 바위에 대주고 때로는 들어 올리다시피 하여 무사히 그 위험천만의 Y코스를 통과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보았다. 형제애란 것이 가족애란 것이 이렇게 포근한 것인가? 가끔은 아쉽고 서운하기도하고 고맙고 감사한 것들의 어우러짐이 인간관계일 것이다. 오늘 만약, 동생들의 따스한 동행이 아니었다면 나의 산행은 얼마나 어렵고 힘겨웠겠는가? 하산하여 막걸리를 한 순배씩 돌리며 우리 형제들은 오늘 산행이 이 막걸리 맛처럼 진국임을 새삼 확인하였다.

    또한 형제들 각각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지내왔기에 각각이 체험한 이야기들을 한 가지씩만 풀어놓아도 순식간에 폭넓게 우리 사회와 여러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가 있어 잔잔한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산행에서 내려와 이곳 도봉산을 뛰어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산악인 엄 홍길님의 이야기며, 부상과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의 그가 있다는 이런 울림을 주는 이야기를 나누며 막걸리 잔을 비웠다.

    ,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시 음미하지만, 야구도 인생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8. 퇴임 후 8년차

    지난해와 큰 변화 없이 아들 태훈이와 딸 나영이의 둘째 손자 탄생이 조급해지는 2016丙申年이 되었다. 거주지가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판교로 바뀌고 벌써 2년이 지났으며 이애 따라 이제 주간 활동 계획이 월요일 서예 사군자, 화요일 성당 레지오 활동, 수요일 사진 강좌와 출사, 목요일 기타활동, 금요일 서예 사군자, 토요일 당구치기, 일요일 주일 미사 참여로 고정되었으며, 그 사이 사이에 월 1-3회 정도 용인에서의 홍천김과 의왕에서의 허김조 스크린 골프가 월 1회 정도의 처제들 및 광6 친구들과의 골프와 월 1회 형제들 및 광6 동기들과의 서울 근교 등산 활동이 정착되었다. 특히 광6 친구들과의 라운딩은 월남 판명 유공자들로 덕산, 만포대 등 군부대 골프장을 이용하여 1/N 부담을 해 주어 주어 부담 없는 라운딩을 하니 너무 좋다. 처는 대부분의 시간을 친,외손주 돌보는데 쓰면서 즐거워한다.

    13일에는 김영남 친구 자녀 결혼식 참여를 위해 청담동 드래스가든홀에 다녀왔으며 처를 먼저 보내고 혼자서 결혼식은 준비했을 친구가 측은해 보였다. 8일 우리 부부 결혼 기념일 간단한 식사애 축하금 지급, 10일 성소 후원회 봉사, 16일에는 장모님 생신 축하겸 송무 처남 둘째 아들 결혼 피로연을 겸한 처가족 모임이 과천에서 있었다. 17일 성당 주차 봉사, 120일에는 미국에서 민학균 친구가 귀국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128일에는 동백 여행사를 통해 덕유산 향적봉 출사를 다녀왔고, 129일 나의 칠순 생일에는 친인척 50여분을 초치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기히 만들어 놓았던 나의 자서전 인생 되어지는 것이다를 선물로 증정하였으며, 400어명의 지인들에게는 우송해 드렸다. 바뀐 주소도 많았는지 반송된 것도 있었다. 확인 하고 보낼 것을 짜증이 났다. 내 나름 얼마나 애를 쓴 것인데..... 131일에는 APC 서울 지사장과 북한강 쪽 출사를 다녀왔다.

    2월에 7일 성당 주차봉사, 14일 성소후원 봉사, 19일에는 민학균 친구 부부와 귀국 기념으로 동백 여행사를 통한 동해안 여행을 다녀왔다. 친구는 미국 여행을 초청하지만 크게 가고 싶은 생각 이 없다. 22-23일 홍문일 부부와 동해안 여행, 27일 동작 문호 복지센터에서 있은 사협총회 참석, 28일 성당 주차 봉사, 13일 성당 아치에스 행사 참석, 16일 운중회 낙산 공원 출사, 20일 성당 주차봉사, 25일 광6 대공원 등산, 29일 건강 검진을 여산이와 함께 우리원 헤스 케어에서 받았다. 30일 나영이 입장권 구입으로 창경궁 야간 출사를 다녀왔다.

    4월에는 3일 동백 여행사 진해 벚꽃 출사, 6일 운중회 부음도 출사, 10일 성당 주차봉사, 14일 동백 여행 고려산 진달래 출사, 15일 광6 용문산 등산, 16일 분당 중앙공원 촬영대회 참석, 21-22일 레지오 궝호원 요셉 초대 웰리휠리 라운딩, 23일 충북 음성 복숭아 촬영대회 참석, 24일 가족 등산 광나루, 30일 월산도 가옥 재개발 협조 싸인,

5월에는 1일 성당 주차봉사, 4일 간염 예방주사 접종, 9일 광6 덕산대 라운딩, 11일 운중회 구리 시민공원 유채꽃 출사, 13일 꾸리아 참석, 19일 광주 주월 씨보존회와 9.1회 참석, 20일 김선호 부부와 나주cc 라운딩과 죽순 채취, 21일 서울 사협 올림픽 공원 촬영대회 참석, 22일 광6 팔당역에서 모영 예봉산 등산 및 성당 주차 봉사, 25일 운중회 선유도 출사, 28일 고양시 촬영대회 참석, 31일 성모의 밤 행사 참석,

    6월에는 7일 송순새일 축하그 전달, 9일 동백여행사 인제 원대리 자작남숲 출사, 11일 꾸리아 공주 황새바위 성지 야유회 참석, 12일 파라솔 선교 할동 및 성당 주차봉사, 14일 허김조 에이스 스크린 골프, 15일 운중회 서래포구 출사, 17일 광6 드산 강촌계곡 드산과 꾸리아 참석, 19일 구룡산 애모산 등산, 21일 정기동 친구 모친상, 편부, 24이일 광6 스크린 골프, 26일 성당 주차봉사, 27일 서예 반원 고기동에서 점심, 29일 공제회 여주 관광 참여, 30일 허김조 스크린골프

    7월에는 1일 처제들과 동여주CC 라운딩, 3-6까지 비경 사진 크럽 회원들(정성한 등)과 일본 홋가이도 꽃축제 출사, 9일 지우 동요대회, 서울 초딩 모임 참석, 11일 안과 진료 및 노인정에서 점심 식사, 12, 허김조 스쿠린 골프, 15일 광6 등산 호명산, 16일 노인정에서 점심, 17일 가족 등산 도봉산, 18일 홍문일 초청 마이더스 cc 라운딩, 22일 용인에서 홍 천 김 스크린 골프, 22일 태훈 가족과 식사, 24f tjdekd 주차봉사, 27일 용인에서 홍천김 스크린 골프, 28일 동백여행사 태백 해바라기 축제 출사, 29일 덕산대 라운딩.

8월에는 7일 성당 주차 봉사, 8,15,26일 용인에서 스크린 골프, 10,16,26일 덕산대 라운딩, 19일 광6 등산 북한강변 걷기와 꾸레아 참석, 21일 서병용과 인천 서례포구와 관곡지 출사, 25일 동여주에서 처제들과 라운딩, 28일 마태오 성당 레지오 전단 원 교육 참석

    9월에는는52차 간염 예방주사 접종, 7일 만포대 리운딩, 9일 인덕원 허김조 스크린 골프, 10일 형제 등반 수유역 3번출구 집결, 11일 성소 후원회 및 주차봉사, 20일 우리농원 운중동 수강생 대표자 회의 참석, 21-22알 분당 서울대 안과 병원 망막 황반변성으로 진료, 23일 광6 아차산 등반 및 성당 꾸리아 참석, 24 레지오 토요 당구, 26일 광6 육담CC 라운딩, 30일 용인에서 스크린 골프하고 자냑 때 나영네와 산사음악회 참석

10월에는 2일 민우네 가족과 태안 천리포 여행, 4일 독감 예방 주사 접종, 5일 간염 예방 주사 접종 6일 하광하여 쌍마회와 주월 시보존회 참석, 8일 김평식 친구 자 결혼식 편부, 8-12짜지 진우회원들과 대만 홍콩 마카오 여행, 17일 하광하여 김선호 부부와 빛고을CC 라운딩, 18일 광주 청솔회 무안CC 라운딩, 20일 홍문일 용인 남서울 어프로치 연습장 이용, 21알 서울 대공원 광6등산, 22-23일 수원 천주교 연수원에서 레지오 기본교육, 25일 용인 실내 골프, 29,31일 서울대 분당 병원에서 안과 진료 2차 시술

   11월에는 2일 서산비행장 CC 6 라운딩, 6일 황도성 노인회장 자 결혼식 편부 및 하광 한사문지회 광주 비엔나 출사 참석, 10-13일 여수 연산회 모임 처만 참석, 15일 덕산대 라운딩, 15-16 운중회 종강 기념 변산반도 선운산 출사, 18일 광6 용유도 걷기, 19-20APC 홍천 연수회 참석, 22-30일까지 서울 광주 여수 순천 광6 연합 태국 다이너스티 CC 골프 연수,

    12월에는 5일 허김조 스크린골프 파토 남 까닭은 허와 조의 하찮은 자존심 싸움으로 참 한심한 인간 들이로다. 8일 덕산대 라운딩, 10일 모친기일 천주교식으로 제사를 모시고 3년상이 지났으므로 내년부터는 부친 기일에 함께 모시기로 고함, 11일 레지오 연차 친목회 참석 우리 뿌레시디움이 윳놀이 우승함, 12일 덕산대 라운딩, 14-18까지 월요 사진동호회 전시회 참가, 15일 안과 진료 3차시술, 16일 광6 아차산 등산후 오리 전문점에서 망년회, 17일 초딩 모임 서울역 대우식당, 19일 예담 한의원 손가락 치료, 21 운중 사진회 율동공원 횟집에셔 종파티,22일 용인 스크린 골프, 23일 생선 탕 집에서 서예 종파티, 24일 김상수 선배 자 결혼식 메모리얼 4층 단독홀 참석하여 고향 선배 친우들 강방원 주상호 주월 씨보존회원 박한섭 소식 접수함, 2629일 용인 스크린 골프,

    광주 중심의 일반적인 모임 참석이 어려워 불참이 많았고, 우선 중심 활동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사진 활동에서는 작년과 같이 가천대학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운중동 주민센터 사진반에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등록하여 공부하고 월 1-2회의 출사를 다녀왔으며, 금년에도 광주에서의,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사사모회, 월요 사진회, apc뉴스, 광주매일 등 사진동호회의 전시회에는 참여하였으나 월례, 분기별 출사에는 참석이 어려웠다, 특히 금년에도 개별적으로 가능한 한 다수의 공모전 출품을 목표로 잡고 사진 활동을 열심히 하고자 하였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공모전 성과가 미진하였음을 감안하여 사진 활동의 흔적을 잘 보존하기 위한 나의 불로그 활동에 열심하였으나, 여전히 자기만족의 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방문객 수를 늘리는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가운데에서도 집에서 가까운 지역의 쵤영 대회에 참가하여 2016423일에는 충북 음성 복숭아 촬영대회에 참가 입선하고 부상으로 복숭아 1박스를 받아 운중동 사진동호회원들과 나누어 먹기도 하뎠다. 611일 제6회 성남 전국사진 촬영대회에서 무당 춤으로 입선하였고, 731부7일 까지는 일본 홋가이도 출사를 정상환님을 비롯한 광주 사진 동호회 회원들과 비경사진여행사를 통하여 다녀왔다. 다녀왔다. 729일에는 제14회 고양 전국사진 촬영대회에서도 입선하였다.

1214-18일까지 월요 사진동호회원전에 참여하였으며, 출품했던 작품들은 기족이나 친지들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작품의 가치를 알기는 하는지?

1119부터 20일까지 강원도 홍천예술문화회관에서 APC뉴스 기자 연수 과정을 마쳤으며 제9회 광주광역시 사진 대전에 출품할 예정이었으나 비용도 많이 들고 수속도 복잡하여 취소하고, 1120일에는 제8회 광주매일신문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하여 그림속으로라는 작품으로 특상을 수상하여 광주매일신문 전국사진대전 추천 및 초대자가가는 되겠다는 목표에 근접하게 되었다. 역시 여유가 생기면 대한민국 사진대전까지는 넘겨다 볼 생각이다. 97일부터 10일까지 광주의 다리라는 주제전을 열었는데 작품을 전시하고 주최측에 기증하였다.   

    골프 활동에서는 추위를 피해서 119일부터 23일까지 지난해부터 계획되어 오던 이화회와의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안 골프투어(투어뱅크 여행사)를 부부가 함께 다녀왔다. 광주의 광육 골프회, 청솔회, 빛나무회, 이화회, 김선호 부부 등 정기모임 참석은 고려하고, 서울에서의 활동으로 바꾸어 대학동창인 서울 광6 골프회와 처제들과의 월 1회 정도의 라운딩을 하였다. 특히 서울 광6 골프 회원인 문일, 봉기, 광열이 친구는 월남 유공자로서 군부대 골프장 회원 대우를 받는 관계로 나를 끼워 1/N 하면 그 혜택이 만만치 않아, '역시 친구는 좋은 것이여! 하며 고마워한다. 광주의 이화회와의 해외 골프투어가 무산됨에 따라 대신 서울 광육 골프회와 광주,순천,여수 친구들과 1121일부터 10일간의 태국 연수를 직영으로 싼 값에 다녀왔다.

  등산 활동은 서울의 광육 등산회에 결석하지 않고 참석하여 서울 지리도 익히고, 출사를 겸하였다. 광주에서 하던 옛길걷기는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고, 형제들과의 서울과 경기 곳곳을 찾아다니며 등산과 사진 활동을 계속하는 것으로 건강을 위한 걷기를 대치하였다. 서예와 사군자 활동은 예년과 같이 자가 연수로 대처하였다.

  46일에는 막내 동생 원이의 점심 주선으로, , 여산, 방원, 미성이가 만나 점심을 함께 하고 봄꽃이 만발한 경희대학교 교정을 거닐며 정담을 나누었다. 실로 형제애를 느끼게 하는 잊지 못할 행복한 날이었다. 막내 원이에게 감사를 드리며, ‘오름차순으로 계속하자일렀으니 다음을 기대해야겠다. 특히 이 자리에는 외가 형님인 창진이 형수님께서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었다. 하늘에서 부모님께서도 우애하는 우리 형제들을 내려다보고 기뻐하셨을 것이다.

  51일부터 3일까지 고교 동창 고향 친구들의 모임인 영산회에서 태안군 안면읍 중장리 693번지 율포길을 걷는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도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 사진찍기에 빠져있던 나는 안면도 빛의 축제사진을 찍고 싶은데, 피곤한데 멀다며 계획대로 하지 않고 그 장소에 가는 것을 포기하는 친구들에게 싸잡아 독설을 쏘아 붙이고 우리 부부만 다녀와 배려 없는 아집을 보였기 때문이다.  629알에는 교원 공제회에서 추진하는 경기도 여주시 역사문화기행이라는 이색적인 여행을 부부가 함께 다녀왔다 

   74일에는 계획대로 나의 형제들이 도봉산 등산을 하였다. 거처를 완전히 서울로 옮기고 처음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모든 것이 생경했지만 이제는 비교적 적응이 잘 되고 있다고 자답해 본다.

오랜 터전이었던 고향 광주지역을 벗어나 한양 깍쟁이라고 예전부터 전해오는 서울 살이를 시작할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것이 한갓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자식들과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오니 뭔가 우선 마음에 안정감이 생기고 이웃사촌이라는 말처럼 사람들도 사귀고보니 모두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자식들이 부모를 배알하는데 기동력이 있어서 좋고 손쉽게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멀리 있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없어서 마음이 항상 가볍다. 더구나 형제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살면 어쩔 수 없이 소원해 질 경향이 많은데 같은 지역에 살고 보니 아무리 바쁜 서로의 일상 속에서도 쉽게 만남의 시간들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문득 평소 해오던 카톡의 패밀리 방에서 가끔 만나, 실행을 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순식간에 의견이 모아져 지난 6월 초에는 청계산을 1차로 하여 가족 등산을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모임에다 특히 산행이라는 전제가 있어서, 어떨까 걱정했는데 성과는 기대를 초월했다. 형제들끼리 서로 오순도순 흙을 밟고 산을 오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마에 땀방울은 송글송글 맺히고 무언가 말 할 수 없는 의미로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옛날부터 손가락도 모두 아롱이 다롱이라 하지 않았는가? 서로 다른 개성과 인생관, 가치관을 지닌 형제들이 서로 마음을 모으고 배려하며 산을 오르는 일은 기쁨이며 행복이었다.

    어떤 가정이던 그러하겠지만, 자랄 때는 한 솥밥을 먹으며 한 부모 밑에서 철없이 자라다가 어른이 되고, 서로의 인생을 각자 살다보면 때로는 서로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자주 만날 수 없어 아쉽기도 한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감정을 경험하며 살아왔다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어 형제들을 만나 산행을 하다 보니 참으로 감회가 컸다. 뭐랄까, 서로가 자신의 배를 타고 먼 대양을 항해하다가 바다가운데에서 함께 만나 그동안의 회포를 푸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렇게 뿌듯한 기분으로 청계산을 내려와서 막걸리에 도토리묵을 시켜놓고 몇 순배가 오고가니, 어릴 때 뒤엉켜 뛰놀며 자라던 시절이 상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답고 푸근한 마음이 되어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오후 해가 짧게만 느껴진다. 이런 것이 가족애며 사람 사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청계산 산행 때, 즉시 72차 모임을 약속했고 그곳은 도봉산이었다. 우리가 잡은 도봉산코스는 포대 능선 정상을 지나 Y계곡을 넘어 신선대로 택했다. 생각보다 난코스였고 여름날씨라 더 쉽지 않았지만, 산행을 다녀온 지금 내 마음은 감동 바로 그것이다. 자운봉 코스가 군대 군대 급경사도 심하고 산 자체가 바위산인지라 뭔가 오르는 느낌이 야성의 맛을 느끼게 하였다. 만월암을 지나면서부터는 악산의 깊은 속살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묘미 또한 대단하였다.

    포대능선을 지나고 드디어 Y계곡을 지날 때는 심한 울렁증과 다소의 현기증이 엄습하였다. 도저히 발을 쉽게 내디딜 수 없는 깎아지른 바위들 사이로 철봉대 하나에 매달려 가는 등산은 내가 지금껏 해온 등산 중 최대의 난코스였다. 그런데 동생들이 일일이 손을 잡아주고 하나하나 발을 잡아 바위에 대주고 때로는 들어 올리다시피 하여 무사히 그 위험천만의 Y코스를 통과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보았다. 형제애란 것이 가족애란 것이 이렇게 포근한 것인가? 가끔은 아쉽고 서운하기도하고 고맙고 감사한 것들의 어우러짐이 인간관계일 것이다. 오늘 만약, 동생들의 따스한 동행이 아니었다면 나의 산행은 얼마나 어렵고 힘겨웠겠는가? 하산하여 막걸리를 한 순배씩 돌리며 우리 형제들은 오늘 산행이 이 막걸리 맛처럼 진국임을 새삼 확인하였다.

    또한 형제들 각각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지내왔기에 각각이 체험한 이야기들을 한 가지씩만 풀어놓아도 순식간에 폭넓게 우리 사회와 여러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가 있어 잔잔한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산행에서 내려와 이곳 도봉산을 뛰어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산악인 엄 홍길님의 이야기며, 부상과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의 그가 있다는 이런 울림을 주는 이야기를 나누며 막걸리 잔을 비웠다.

     ,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시 음미하지만, 야구도 인생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살아가리라.

   퇴임한지도 벌써 7년이 지나갔다. 그 동안 나의 체면과 생할을 유지시켜주던 퇴직금을 7년이나 받아먹었다는 이야기다. 이제 본전을 뽑은 셈이다.

   인생이란 것이 화살에 올라앉아 날아가는 것과 같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인생이란 고민하면서 길을 찾는 것이라고도 했다. 누구라도 자신이 살아온 한 인생이 흡족하고 귀감이 될만한 것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살아있음 자체가 형언할 수 없는 상황과 인연들의 연속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사는 일이 녹녹치 않음을 절감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일 게다. 그래도 의미로웠다고, 보람있었다고, 나보다 남을 위하려고 노력했었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방일하거나 잔꾀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맹자는 이르기를 순천자(順天者)는 존()이요. 역천자(逆天者)는 망()’이라고 하였다. ‘천리에 순응하는 자는 번영과 생존을 누리고, 천리에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말이다. 되돌아보면 최소한 나의 삶이 하늘의 뜻에 따르려고 애썼고 순리에 어긋나게 살지 않으려고 애썼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어긋나거나 모나지 않게 원만하게 살아온 것도 따지고 보면, 선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덕 아니겠는가? 고맙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드는 것은 철이 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야 하늘의 뜻을 조금은 알게 되고 그 뜻에 부합되게 살려고 있고 있다.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지나 암중모새의 젊은 날들을 지나 이제야 사람으로 태어나 살다가는 것이 죄 닦음의 하늘의 뜻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원죄설을 수긍한다고나 할까? 신의 섭리를 명징하게 깨달았다고나 할까? 요즈음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람답게 살았던 소설가 박경리는 소설 토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 사람이 사는 것이 어디 죄 닦는 것이여? 오히려 죄를 짓는 것이제.” 음미해보면 사람 사는 일이 죄를 닦는 일이기도 하면서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옛날에 한 왕이 하도 잘난 채를 하는 신하들이 맘에 들지 않아 하루는 모두 눈을 가리고 커다란 코끼리를 만져보게 한 후 , 눈에 쓴 안대를 풀고 자기가 만져 본 코끼리의 생김새를 마하게 했다는 이야기에서처럼 우리내 삶도 이러하리라. 내가 장님이 되어 살아본 삶을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우며 고집 부리다가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은퇴하고서도 여러 일들을 섭렵하며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보려고 애쓰는 노력 속에 다만 나의 진실이 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탐내거나 속단하거나 평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즈음 느끼게 된다. 누가 됐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받아드리고 존중하면 그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가면 통곡의 벽이 있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어딘가에는통곡의 방도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벽을 치며 회한에 쌓여 통곡하고 울부짖다가 어느 사이엔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돌아가 새롭게 삶을 시작한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살아야 겠다.’라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고 다듬으면서 한 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수없이 밀려오는 인간관계나 인연들은 우리를 희노애락에 물들게 하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닌, 조류에 휩쓸려 가는듯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이 모두가 나의 삶이었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때론 내 마음에 분노를 일게 한 사람까지도 사실은 사랑하고 보듬어야할 하늘이 나를 위해 보낸 사자(使者)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을 산다는 것은, 미완성의 내가 완성을 향해 부단히 고군분투하며 거룩한 영적 세계로 가기 위한 훈련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 보니 퇴직 후의 내 활동이라는 것이 이처럼 해마다 변화 없이 순환될 것 같은 예감이다. 그래서 금년에는 내년 칠순 기념으로 나의 행적 연보 수준의 자서전 책자 발간을 위한 원고를 준비하였다. 내 인생을 정리한다는 의미와 후손들의 뿌리 교육을 위해서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동생 미성이가 감수해주는 등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이제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80이라니, 팔순에는 기념 사진첩이라도 만들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이를 목표로 나아가보자. 나는 요즈음 앞서 이야기한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면서 기쁘게 살고 있다. 이렇게 사노라면 인생살이가 재미있고, 평안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내가 성령의 한 가지 열매로 꼽고 있는 이 재미는 노년기를 틈타 슬며시 들어오려는 우울증도 얼씬 못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