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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신설학교 살리기에 바빴던 일로남교 청망분교 시절   

소광선생 2017. 4. 27. 22:11

               신설학교 살리기에 바빴던 일로남교 청망분교 시절

  

1978. 03. 01자로 부임한 일로남 청망분교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의 분교인데다가 고향 학교이니 어려움도 생소함도 없이 부담 없는 학교생활로 쉽게 적응하였으며 감회가 새로웠다. 본교는 나의 선배인 본교 학구인 청호리 출신인 문 충식님의 지원으로 학교가 세워졌다. 그분의 부인은 나와 국민 학교 동창인 연숙님이었고 그 선배의 송덕비 제막식에는 함께 기념촬영도 하였다.

    

          

           송덕비 제막 기념 사진 


학교를 지어서 헌납하는 동창생도 있는데 그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나 자신이 참 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본교는 6학급에 차민섭 교장선생님, 나종달 교감선생님에 이어 이양수 교감선생님, 무슨 까닭인지 사제 관계를 서로 밝히지 못하고 지낸, 국민학교 4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셨던 윤갑병 선생님, 고향 대선배이신 나상언, 양승회 선생님, 교대 1년 선배인 송기호 선생님 등 7분의 선생님과 신설학교 갖추기에 보람 있는 나날이었다.

날마다 운동장 축대 조성하기, 운동장에 돌 깔고 다듬기. 계단 콘크리트 비벼 넣기, 화단 조성하기, 나무심기, 운동장 스탠드 만들기 등을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가며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힘든 줄도 모르고 작업하였다. 

               

                                               교직원 일동

 

   여선생님이 없는 벽지학교인 관계로 운동회 때에는 무용지도까지 하여 학부형들의 환호와 칭송을 받았던 일, 6학년을 맡았을 때 진숙 학생에게 웅변 지도를 하여 목포에 출전 본교로서는 최초의 우승기를 가져왔던 일, 졸업식 때에는 6학년 담임이라고 학부형 대표가 목포에까지 직접 동반하여 양복을 맞추어 주었던 일, 학부형님들 가정에 제사라도 있던 다음 날이면 초대를 받아 대접 받던 일 등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그립다.

내 교직생활에서 첫 번째 6학년 담임을 맡아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었는데, 그 때 그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식 없는 그 제자들이 야속하고 혹시 나의 잘못은 없었을까? 하는 걱정도 있지만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교육연수활동도 열심히 하여, 문교부 주관 국민학교 인구교육을 이수하였고, 벽지학교에서 열심히 헌신한 결과 학급경영, 학습자료 전시회, 국민정신 교육 자료전 등에서 다수의 교육장, 교육감 상은 물론 국민교육헌장선포 12주년 문화부 장관 포상, 학습지도 우수교사 문화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하였으며, 전라남도 교육연구원 현직연구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회 졸업기념

 

   이렇게 시간은 흘러 벽지학교 근무 기한 만료가 되었고, 이제는 광주로 전입을 해야 되는데 그러려면 근무평정을 잘 받아야 했지만, 나보다 먼저 전입한 선배 또한 광주 전입이 목표였기 때문에 경합이 되었고 후배인 나는 양심상 할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이 내 운명인가? 관내 이동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될 대로 되라!’ 포기하는 마음으로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인사 발표 당일 교장 선생님께서 "자네는 유보 되었던데? 나하고 1년 더 근무하게 되었어. 잘 된 일이지?" 하시며 생각도 못했던 기적을 선물하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순리에 따라 선배를 광주로 보내드리고 나는 다음 해 1982. 03. 01자로 광주 문화초등학교에 발령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안군내 같은 벽지 분교인 무안 북 국민학교 소속인 탄도 분교에 있는 선생님이 유보 운동을 하여 유보하게 되었는데, ‘같은 조건인 김만원 선생님만 전보 조치하면 되겠느냐? 같이 유보시키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일이란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시 하느님의 뜻함대로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체험적으로 배워가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가정적으로는 동생 여산이의 결혼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결혼할 동생이 살 집을 근무처가 있는 서울에 마련해야 하는데 너의 적금을 해약해 달라.’고 하여 할 수 없이 지상명령이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승낙해 드렸었다. 그 시절은 부동산에 투자만하면 큰돈을 벌던 시절이었는데, 나에게는 원대했던 계획이 파토 나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던 기억이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