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용봉 국민학교 시절
11. 용봉 국민학교 시절
1987년 구정을 3일 앞두고 아버지께서는 지병이던 심장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치의의 권유에 따라 심장 스탠스 시술을 받으시려고 병원에 입원하셨다. 우리에게는 사전에 자세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늘 그러하셨듯이 혼자서 쓸쓸히 막내 동생이 근무하던 전남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셨다. 막상 시술에 들어가고 보니 병증이 심각하여 중도에서 시술을 중지했다고 병원측은 설명했다. 결국 혈전으로 인한 뇌경색 후유증만 얻은 채로 장기입원의 단계로 들어가셨다. 뇌에 혈전이 커짐에 따라 언어장애가 왔고 차츰 팔다리에 마비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거동이 어려워졌고 그 다음엔 의식에 장애가 왔고 끝내는 폐렴 합병증으로 음력 2월 그믐 날 운명하시는 슬픔을 맞았다.
돌아보면 아버지의 삶은 뭐라고 설명이 불가한 알 수 없는 쓸쓸한 삶이었다. 물론 굽이굽이 행복하고 따사로운 날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 아버지의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서릿발처럼 차가운 어머니에게 따사로운 애정도 넘치게 받아보지 못하며 자란 분이다. 가슴 한켠 깊은 곳에 타인은 공감하지 못할 한(恨)과 우수(憂愁)가 서려있었을 것이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또 다른 사람도 편안하게 사랑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아버지는 할머니처럼 고매한 사람이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한 채로 떠나가셨다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누구나가 다 힘들게 외로운 삶을 끌고 다니며 속으로 울음 울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나의 원활하지 못했던 소통도 이제는 이해하고 보듬을 수가 있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의 하나의 과정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1987. 03. 01자로 본교에 발령을 받았고 겨우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아버지의 상을 당해, 당시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전 교직원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어 감사함과 송구함을 이 기회에 다시 보내 드린다.
학습지도 연구학교이고 도서실이 있는 용봉국민학교에 발령을 받고 기대에 부풀어 부임 하였던 바, 전임교의 경력이 따라다니는 교직 사회의 특성상 연구통으로 알려졌는지(?) 연구학급과 주제 담당 교사를 제의 받았다. 그러나 사서교사 자격연수 교육을 받기 위한 원래 계획대로 도서실 담당 업무를 희망하고 주제 담당은 고사 하였다. 그렇게 원하는 대로 되었으나 세상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예상대로 다음 해 사서교사 자격연수가 있었고 공문 상으로 대상자 선정은 '도서실을 맡고 있거나 앞으로 맡을 사람'으로 되어 있어, 당연히 내가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희망자가 많다는 이유로, 부장중심의 투표로 결정하자는 교장, 교감 선생님의 기상천외한 독선적 의사에 따라 결국 투표에 부쳐졌고, 교장, 교감 선생님이 밀어준 새로 전입되어 온 목포 사범 출신의 선배 선생님이 대상자로 결정되었다.
시간이 흐른 후 이해는 되었다. 인사성도 없는 놈이 요청한 연구 업무는 고사하고 도서실 담당을 희망하는가 하면, 부임하자마자 부친상을 당해 학교에 부담을 주어 미운털이 박힌 놈이 제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요구하니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원칙을 벗어난 인사 처리이긴 하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이랬다. 김만원 교사는 ‘아직 젊고 기회가 많으니 양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논리였다. 이렇게 해서 일은 원만하게 마무리 되었다.
다시 생각나는 일이지만, 나와 경합하여 사서연수를 가게 된 선생님과의 화해를 위해 자리를 주선해 주셨던 고등학교 선배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문정순 선생님의 고마움과 훌륭함을 잊을 수가 없다. 옹졸했던 나는 화해를 주선해 준 자리에서 ‘화해 할 수 없다’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고, 그렇게 연수를 받고 다음 해에 승진하신 그 선생님께서 1년 후 교통사고로 타계 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 때는 ‘그것 보라는 듯’ 못된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사랑으로 포용하지 못했던 나의 마음이 아플 뿐이고, 화해의 자리를 주선해 주신 선생님께는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이 기회를 통하여 타계하신 선생님께는 명복을, 선배 선생님께는 감사를 보내 드린다.
당시, 이렇게 나의 계획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아픔과 갈등을 달래기 위한 돌파구로 그동안 잊고 지내던 향학열을 일깨워, 공부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였다. 이미 방송통신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나는 학교 앞에 있던 통신대학 학습관을 찾아 열심히 공부에 몰두 하였다. ‘88년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고 정식 교육학사가 되었고, 목포에서 시작했다가 그 동안 쉬었던 서예연수를 학정 서예원에서 다시 시작하였다. ’90년에는 학정 서예원 소속 연우회원 작품평가전에서 상을 받은 것을 끝으로 태만해졌다. ’92년에는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여 상담심리 전공 교육학 석사와 중등학교 2급 상담 정교사 자격증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으로 오묘하시다고나 할까? 그렇게 평안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87.06.19일 목포고등학교 제14회 동창회 졸업 22주년 기념 가족 동반 야유회를 가졌던 즐거운 추억, 아버지의 타계로 가장이 된 나는 홀어머니를 도와 ‘89년 셋째 동생 방원이의 결혼식을 주관하는 보람 있는 일 추진, ’91년 장남 태훈이가 동신중학교를 졸업하고 숭일 고등학교에 입학한 일, ’90년 딸 나영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광여자 중학교에 입학한 일도 이 학교에서였다.
고등학교 동창회 가족동반 야유회
교육적으로는 연구 활동 또한 열심히 하여 제 2회, 3회, 4회, 5회 광주 현장교육 연구발표 대회, 제5회 과학 실험실기 대회 등에서 입상 하였고, 재직자 정신교육, 제5차 새 교육과정 연수, 한국 우주 소년단 지도교사, 연구주임교사 등 연수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또한 제5차 교육과정 연수 강사, 교단선진화 자료개발 위원, 교육과정 이수평가 출제위원 등의 활동도 하였다.
아내는, 광주시가 광주광역시로 승격됨에 따라 부부교사 우대 점수에 의한 광주 전입이 가능해져 ‘88.03.01자 광주광역시 대촌 중앙국민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90.03.01자로는 광주 서산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아 드디어 광주시 근무 부부교사로서 부러움을 받기도 하였으니, 역시 세상일은 인간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라는 진리를 또 다시 터득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렇게 5년이라는 세월은 빠르게 흘러, 나는 또 새 임지를 찾아야 하는 고민을 해야 했다. 광주에 입성하면 전직(轉職)을 위한 일반대학교 편입부터 하겠다던 나의 꿈은 어느 새 잊혀지고, 승진을 위한 점수 인생으로 전락한 것이다. 나는 점수가 있는 연구학교를 찾아 점수의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고향 선배님들의 러브콜이 있던 각화초등학교를 선택하여 내신서를 내기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