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5. 주말부부 생활도 즐거웠던 광주 문화초등학교 시절
주말부부 생활도 즐거웠던 광주 문화초등학교 시절
우여곡절 끝에 기적 같이 1982년 03. 01자로 광주 문화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동시에 내가 있던 청망분교에는 광주 전입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아내가 발령을 받는 겹경사를 얻게 되었다. 이 시절 아내는 아들과 딸을 이끌고 출퇴근 하느라 무척 고단한 생활을 해야만 했고, 우리 부부는 견우와 직녀의 만남 같은 즐거운 시절을 보냈다. 광주와 무안으로 근무지가 서로 달라진 우리 부부는 매 주말에만 만날 수 있는 주말 부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말에 내가 주로 무안군 일로 읍에서 셋방을 살고 있는 아내를 만나러 가는 형국이었다.
아들딸의 청망 분교 시절 모습
이 시절 생전 차음으로 가족여행이라는 것도 하였다. 장인장모와 어머니를 모시고 부곡 하와이 온천 여행을 하기도 하였으니, 그 시절을 살았던 대부분이 가족여행이란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런 점에서도 무심한 인간이었음을 반성한다.
어머니 장인 장모 아들 딸과 함께 부곡 온천에서 한 때
광주로 발령을 받은 몇 개월 후 5.18 사태로 광주는 시끄러웠으나 난 학교생활에 충실하였고 세상일에는 무관심하였다.
광주로 전입한 나는 여전히 세상일에 미숙함을 졸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매일 매일의 일상에 충실하고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 했을 뿐, 남들처럼 융통성 있게 약삭빠르게 현실을 보는 영악함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광주에 거처할 곳도 마련하지 못하고 부모님 집에서 기거하며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밥을 먹고 출퇴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죄송스러움을 느끼고 “조금만 기다리시면 넓고 큰 단독주택을 구입해 함께 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씀 드렸다.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승낙도 하셨다.
아버님 보시기에 결혼까지 시켜 논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시는 어머니가 몹시 민망하셨던지. 어느 날 아침 식사 중 갑자기 아버지께서는 “다 키워 결혼까지 시켜 놓은 자식이 부모에게 얹혀사느냐!”는 꾸중을 하셨고, 순식간에 당한 섭섭함으로 나는 마음이 몹시 언짢게 되었다. 자식의 집 마련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상의나 조언도 없으신 아버지가, 아버지의 도움 요청이 있으실 때마다 도와드렸던 지나간 기억은 다 잊어버리시고 저리도 박절하게 말씀하실 수가 있나 싶어 서러울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그 즉시 동료 교사의 도움을 받아 두암동 소재 광신 아파트를 계약하였다. 광주 전입 3년 만에 처가 쪽의 일시변통을 받아 내 집을 마련하여 이사를 하게 되었다. 기쁨보다는 ’우리 부자가 소통이 원만하였다면 대가족의 기쁨을 맛보며 한 집에서 살 수 있지 않았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나고 보니 이 또한 결국에는 하느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집들이를 하던 날, 집들이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내가 대단하게 느껴지셨던지, 아니면 자식의 능력이 믿기지 않아서였는지? 혼자 말처럼 ‘처가집이 부자라서 아파트도 쉽게 구하고......’라고 말씀을 흐리셨다. 그러나 우리 부부 입장에서는 계약금 등 급전은 처가에서 일시 돌려썼지만 누구의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고 고생 끝에 이루어 낸 우리만의 결실이어서 지금도 가슴이 뿌듯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동 학년 별 집들이를 했던 추억이 새롭고 그때 그 다정했던 선생님들이 그립다.
교직원 일동
본교의 학교 규모는 50여 학급으로 복수 교감 체제인 대규모 학교로서, 이 때 함께 근무 했던 박홍주, 임명재 교장선생님, 임종연, 송규석 교감선생님, 한충현, 김영수, 김봉현, 맹광립, 송상남, 김용수, 정준진, 윤덕삼, 모효준, 박성천, 김영대, 장오수, 한홍근, 조형모, 이현재, 정용문, 양회진, 박윤배, 서숙근, 강순남, 이정숙, 박복순, 이병관, 오학수, 민양기, 박성주, 여정호, 안경선, 강병원, 김여욱, 박권부, 김옥은, 나영자, 김경자, 김영희, 임연, 취규복, 김연자, 김순남, 유영미, 정혜순, 임성심, 박정숙, 박광자, 이화자, 김오미, 장주영, 최학수, 강기남, 임곡우, 신훈업, 김용호, 장명관, 정찬희, 박춘자, 김형곤, 박치남 선생님 등 모두 다 잊을 수 없는 보고싶은 얼굴들, 다시 만나 회포라도 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이 시절, 본교 선생님들은 광주 전입이 처음인 경우가 많아 아주 순수하고 정적(情的)이셨다. 대부분 퇴근을 함께하였고, 아쉬움으로 그냥 헤어지지 못해서 2, 3차의 약주 자리가 이어졌고, 술 깨우기 당구라도 치는 날이면 보통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곤 하였다. 이제는 돌아가신 분, 퇴직하시고 노후를 행복해 하시는 분, 근무시절 조직한 부부 동반 모임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분까지 다양하다.
무안 근무시절부터 과학 통으로 꽤나 알려진 나는 고향 선배 교사의 알림으로 부임하자마자 차기 과학부장을 전제로 여자 과학부장 선생님 밑에서 실질적인 과학담당 업무를 맡아 열심히 활동하였다.
교직원 남해 야유회
각종 대회 및 논문 쓰기 등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고, (전남교육회보 창간기념논문, 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 지도, 과학전람회 지도교사, 전남도내 교육연구논문, 교육현장개선 연구논문, 현장 연구대회 등) 각종 연수회(단기 과학교육, 초등교원 과학실험실습 지도요원, 학습지도, 교육공무원 정신교육, 컴퓨터교육 등)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광주 전입이 쉽지 않던 아내는 1984. 03. 01자로 광주 인근의 담양군 봉산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아 온 가족이 함께하는 경사를 맞았다.
매사에 계획을 세워 일관성 있게 노력을 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진 나는, 4년제 대학교 편입이라는 광주 전입 목적을 잊어버리고 학교 일에만 매달리는 우(愚)를 범하였다. 이는 내년에 부장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소심함 또한 작용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전입 1년차인 다음 해에는 과학부장을, 다시 1년 후에는 연구부장을 맡아 광주광역시 동부교육청 지정 학습지도연구학교를 운영하였고, 다시 다음 해에는 교무부장까지 승승장구, 광주 시내 최연소 교무부장으로 책임을 가중하게 되었다. 그때 교육청에서 학교를 방문한 장학사님들께서는 저를 보고 너무 젊은 교무부장이라고 칭찬과 놀라움을 함께 표시하였다.
이렇게 최연소 교무부장이 되기까지는 소신을 갖고 나의 능력을 인정해 주시던 송 규석 교감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나에게 특별하셨던 고마우신 교감선생님과의 소식이 단절된 지가 너무 오래되어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풍문으로 들려온 소식으로는 장남을 따라 서울로 가셨다는데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지.... 다만 보고 싶을 따름이다.
이 시절, 테니스를 시작하였고 교직 친구들, 동네 테니스 동호인들과 함께 날마다 열심히 테니스에 빠져 지내기도 하였다.
문화국민학교는 나에게 있어 의미 깊은 학교였다. 아들과 딸이 이 학교에서 초등학교 공부를 하고 졸업 하였으며, 매서움과 부담만 주는 부모에 반하여 동료 교사 자녀라는 특혜(?)로 여러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 태훈이는 3학년 때 자연 시간 중, 다른 조에 불을 붙여 주려다가 알콜 램프를 엎질렀고 다른 아이가 엎질러진 알콜을 얼굴에 바르는 순간 불이 붙어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려, 학교 전체가 크게 걱정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배려와, 다행히 깊이 데이지는 않아 쉽게 치료되어 다행이었던 에피소드가 있다. 이 때 야단맞을 각오가 되어있던 아들에게 꾸중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해준 나를 저도 잊지 못한다고 토로한 바 있다. 원래 부모란 그런 것이다.
가정적으로는 그 동안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며 자유롭게 역마살을 끼며 살아온 여동생 근하의 결혼식과, 평생 친자식처럼 나를 돌보아주시던 큰어머니의 초상을 이 학교에서 맞았다.
이렇게 광주 문화국민학교 5년 임기가 끝나가고 다음 학교 발령 선택을 위해 고민하게 되었다. 교사로서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벽지 점수와 1급 정교사 자격 연수 점수가 낮은 나는 교감 승진이 어려운 상태였었는데 자격 연수 점수를 대치할 수 있는 점수가 사서교사 자격 연수 점수였다.
그래서 도서실이 있는 학교로의 전출이 필요했고, 알아보니 용봉 국민학교였다. ‘그렇다! 차기 희망학교는 1급 정교사 자격 연수 점수를 갱신할 수 있는 용봉 국민학교다’ 라고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