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10 성지순례 56, 청주교구 진천 백곡 베티성지를 가다
주소 : 충북 진천군백곡면 베티로 663 - 13 T; 043) 533 -5701 F: 553 - 5721
미사 : 화 - 일 . 오전 11시 (월요일 미사 없음 ) 고해성사 : 미사전후
식사 (사전 예악 필요)
가는 길 ; 경부 고속도로 : 안성 분기점(JC) - 남안성 IC - 산압단지 사거리(좌회전, 종합운동장 방향)
- 현수 사거리 ( 우회전, 진천 방향) - 마둔 저수지, 석남사, 베티고개, 중앙 CC 경유 - 베티성지
중부 고속도로 : 진천 IC 좌회전 - 신성 사거리 우회전 - 벽암 사거리 우회전, 34번 국도
- 벽곡 면 소재지 베티 안내판 우회전 - 안성 중앙 CC 방향 313번 지방도로 - 베티성지
1976년 9월 성지로 개발된 베티성지에는 1996년 6월 완공된 선당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 성당)과 청동으로 만든 십자가의 길, 야외제대 및 성모상,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와 최양업 신부의 성당 및 사재관으로 사용되던 초가집을 재현한 건물, 양업 영성관 및 수련관, 무명 순교자 6인 묘역 및 14인 묘역, 최양업 신부의 동상 등이 있다.
각 지역과 쉽게 연결되면서도 깊은 산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 부텨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다.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 온 프랑스인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1837년 5월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와 함께 베티에서 성사를 주었고, 이로써 베티 교우촌은 충청도 최초의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후 기해박해 (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를 거쳐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교우촌 수는 더욱 늘어나 현재까지 확인되어 기록에 나타난 교우촌만 은골,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등골, 발래기, 퉁점, 새울, 지장골, 원동, 굴티, 방축골, 등 베티를 포함해 모두 15곳에 이른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신부 시절이었던 1850년 대목구장 페레올 고요한 주교로부터 '조선대목구
소신학교 ' 설립 지시에 따라 베티 교우촌 안에 신학교 교사로 사용할 방 2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했다. 다블뤼 교장 신부는 1853년 여름까지 베티에 상주하다가 다시 교우촌 순방에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티 신학교를 맡게 되였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유학에도 힘을 써 1854영 3월 신학생 3명(임 빈첸시오, 김 사도 요한, 이 바울리노)이 말레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이후 배티 신학교는 문을 닫고 제천 배론 성지에 새 신학교가 설립되지만, 초가집으로 된 성당 겸 사제관에는 최양업 신부,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 패롱 권 스타니슬라오 신부 등이 오랫 동안 거하며 사목활동을 했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한국 교회 2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5살에(1836년) 중국 마카오로 유학, 1849연 4월 15일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중국 요동 성당에서 7개월 사목 활동 후 1861년 6월 15일 만 40세의 나이로 선종하기까지 11년 6개월 동안 조선의 복음화에 일생을 바친 백색 순교자 또는 땀의 증거자이다. 최양업 신부는 1853년 여름 조선대목구 신학교 지도를 맡은 이후 3년 동안 배티 교우촌을 사목의 중심지요 본당으로 삼아,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해 왔다. 사목 순방이 끝나는 9 ~10 월에는 배티 사제관에 거쳐하면서 저술에 몰두하여 글을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천주가사'를 짓고,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天主歌辭' 聖敎功課를 번역하여 한글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을 지었다.
배티의 인근에는 복자 오빈지 바오로의 묘소를 비롯하여 '6인 묘'와 '14인 묘' 등 유명, 무명 순교자 묘소가 산재해 있으며, 박해 시기 동안 배티 일대에 체포된 순교자 수는 34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놋점 출신 오빈지 바오로와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