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

23.04.13 프란치스코 성지순례 회원들과 추자도 성당에서 미사드리고 황경한 묘, 눈물의 십자가를 순례하다

소광선생 2023. 5. 4. 16:32

       추자도는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덜어진 섬으로 상 . 하추자, 추포, 힝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이곳 하추자도에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의 묘소가 있다.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와 정난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황경한은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부친 황사영이 순교한 후, 어머니 정난주가 제주도로 유배되는 과정에서 하추자도에 남겨지게 되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남펀 황사영은 조선 교회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고자 배론의 토굴에서 중국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한다. 하지만 백서는 주교 에게 발송되기 전에 발각되었고, 이 때문에 왈사영은 순교하게 된다. 황사영은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 5일에 능차사의 판결을 받았다. 이어 11월 7일에는 마라아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유배형이 내려 졌으며,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 마리아는 전라도 재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정난주는 1801년 음럭 11월 21일 두 살 난 아들 경한을 품에 안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은 뒤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는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추자도 예초리 서남단 해안가 갯바위에 아들을 내려놓고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추자도에 남은 경한은 吳씨 성을 가진 어부의 손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성장하게 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예초리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吳씨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거두어졌다.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이름과 생년월일에 따라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되었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져졌다고 한다. 오시의 집에 서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 건섭과 태섭을 낳았는데, 구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 살고 이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뜨려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그가 황경한임을 알게 됐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기에 아직도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하한 황경한은 사망 후 예초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하추자도의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 집안에서 간직해 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그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