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

19.09.21 성지순례 66 대전교구 대흥 봉수산 성지를 가다

소광선생 2019. 10. 10. 16:31

      주소 : 충남도 에산군 대흥면 의좋응 형제의 길부북로 25 -12(대흥 동헌 옆)    T; 041) 333 -0202      

        미사  :  월 7시 (순례자 예약시 11시), 화 ~ 주일 11시 

        는 길 ;  전철. 기차 : 

                       버스 이용 : 



     대흥 봉수산 순교성지는 대흥의 자연, 사람,  하느님에 대해 복음으로 살피고 순교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대전교구장령' (제 2015 - 16호)에 의거 설정되었다.

     다음을 특별히 기억하고 현양한다.  - 순교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 (1801년 8원 16일). - 한국 124위 순교 복자 (2014년 8월 16일).  - 교황 프란치스코 자연에 관한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2015년 6월 18일).

     대흥 봉수산 성지의 지리적 특성 - 대흥군 홍주목과 공주목을, 호남과 충청도와 한양을 잇는 역참이 있던곳이다.  - 대흥은 예산, 홍주, 공주, 청양지역 복늠전파 와과 박해의 길목이 되었다. - 신미년(1871)에 대흥, 홍주, 신창에 척화비를 세워 천주교의 확산을 차단하고자 했다.

     대흥 봉수산 순교성지의 은사와 영성 -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복자 김광옥은 신앙과 은수 생활, 옥순례와 순교에 이르기까지 탁원한 인교와 우애를 보여 주었다. - 두 복자 "1. 천주교를 배반치 말라(信德).  2. 교우를 일러 바치지 말라(愛德) 3. 성불과 교회 서적을 바치지 말라.(望德)"는 [순교자 3계]를 목숨 걸고 지켰다. 

               "내일 정오에 천국에서 다시 마나세"  









      김장득 (? ~ 1801)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에서 태어나 친인척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여사울 이존창 루도비코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계명을 지키며 기도와 복음 실천 등 신앙생할을 열심히 실천하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은 1796년 여름부터 1800년 봄까지 몇 차례 서울을 피해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성사를 베풀며 전교를 하였다. 이 때 교우들을 만나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성물과 교회서적들을 가지고 있다가 박해를 피하면서 땅에 묻었다.

     김정득은 김광옥과 함께 1739년 말 공주 마곡사 인근 무성산에 숨어 오로지 기도와 교리 실천에 전념하다며 다가올 순교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 포졸들에게 잡혀 대흥옥과 예산옥에 가각 갇혔다. 둘은 홍주, 청주, 포청옥 등에 갇혀 고문과 문초를 받앗지만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성모님께 의탁하며 천주님과 교우들을 배반하지 않고 교회 성물과 서적을 지켰다. 

     신유년(1801년) 8월 21일 내려진 사형 선고문에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김정득과 김광옥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 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잇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중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서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김정득과 김광옥은  그 동안의 형벌로 인해 걸음조차 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용기와 힘으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예산과 대흥의 갈림길에서 헤어지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ㄱ손을 마주 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김광옥은 예산옥에 갇히고, 김정득은 애흥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튼날 읍내 물가고 끌려가 김광옥은 예산에서, 김정득은 대흥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다. 1801년 8월 25일(음 7월 17일), 감종득과 김광옥은 서로 약조한대로 한날 한시에 '의좋은 순교자'가 되어 주님 품에 함께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