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10 관활 : 모슬포 성당 T; 064) 794 -2074
가는 길 ; 제주 공항(공항버스37번) - 하귀 2리 하차, 시외버스 승차 후 모슬포에서 하차 - 모슬포에서
택시 이용 - 추사 김정희 유배지 경유 - 대정성지 : 약 6km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현(정약종과 정약용의 맏형)의 장녀로서, 15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던 황사영 알렉시오의 부인이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남펀 황사영은 조선 교회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고자 배론의 토굴에서 중국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한다. 하지만 백서는 주교 에게 발송되기 전에 발각되었고, 이 때문에 황사영은 순교하게 된다. 황사영은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 5일에 능치사의 판결을 받았다. 이어 11월 7일에는 마라아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유배형이 내려 졌으며,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정난주는 1801년 음럭 11월 21일 두 살 난 아들 경한을 품에 안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은 뒤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는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추자도 예초리 서남단 해안가 갯바위에 아들을 내려놓고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추자도에 남은 경한은 吳씨 성을 가진 어부의 손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성장하게 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예초리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뜨려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그가 황경한임을 알게 됐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기에 아지도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혈혈 단신 으로 제주목 관비(官婢)로 신분이 추락하게 된 정씨는 제주의 거친 바람만큼 모진 시련을 신앙과 믿음으로 이겨냈다. 뿐만아니라 풍부한 교양과 학식 그리고 굳건하고 깊은 믿음의 덕으로 '한양 할머니'로 이웃들의 칭송과 사랑을 받았다. 그 후 37년을 살다가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녀를 양모처럼 보양하던 집주인과 이웃들이 모슬포 북쪽에 있는 들판 (속칭 한굴왓)에 매장하였다.
그녀가 비록 순교를 하지는 않았으나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가득했기에, 후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