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19.04.06 성지순례 37, 전주교구 풍남문 성지를 가다.

소광선생 2019. 4. 8. 19:01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 3길 1(전동)       T; 063) 285-5755    F ; 285 -5755  

  는 길 ;  서울 방면 :  전주 시청에서 팔달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 가다가 충정로 4거리를 지나  풍남로 교차로에서 우회전                                               


                  


 

보물 제308호(1963.01.21 지정)

  

  풍남문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요 복자인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호남의 사도 복자 유항검과 초대 전주 지방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순교한 곳이다. 윤지충은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이듬해 명례방 김병우의 집에서 서학을 접한다.  얼마 후 정약용 형제들의 지도로 열렬한 신자가 되고 다시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에게 전교한다. 

   1791년 (신해년) 여름, 진산에서 윤지충 바오로가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외종형 권상연 야고보와 상의,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전총 의식인 유교식 장례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는데 이를 '진산 사건'이라 한다.

   그 후 전통사상을 거스르는 이 행위는 천주교 박해의 구실이 되었고, 12월 18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 되었다.

   윤지충이 전라 관찰사에게 적어서 넘겼다는 '공술서'는 한국 교회사에서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공식 변론으로 기록되고 있다.

   견고한 신앙을 조목조목 정연하고 조리 깊게 적은 이 변론은 훗날 신도들의 영적 독서로 읽혔고, 복자 정약종의 아들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쓴 [상제상서]의 뼈대가 되었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자 전주는 풍패지향으로 중시되어 태조 원년(1392)에 완산유수부로 승격되면서 호남지역을 관할하는 전라도의 수부가 된다. 중국 진 왕조 이후 중국 천하를 재통일한 인물이 한고조 유방이다. 그는 풍패(지금의 강소성 패현) 출신이었다. 전주는 조선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관향. 그래서 유방의 고향 풍패에 견주어 과거에는 전주를 흔히 풍패향, 풍패지향이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에는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전주성의 남문이 바로 풍남문이다. 후백제의 왕도였으며 조선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를 상징하는 풍남문은 유서 깊은 성문으로 근래에 복원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전주의 명물이다.

   이러한 풍남문은 고려 공양왕 원년 때(1388년) 최유경 관찰사가 축조하였으나, 영조 때(1734년) 조현명 관찰사가 부성을 크게 개축하였다고 하며 이 때 동.서.남.북문 등이 헐려져 없어지고 3층으로 된 남문만이 남았던 것이 근래에 고증에 의해 복원되었다. 영조 43년 3월(1767년)에 크게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홍낙인이 성루를 복구하고 명칭을 풍남문으로 바꾸었다. 풍남문이 겪은 큰 사건은 정유재란 때 왜적이 전주부성으로 침공하자 성을 굳게 지키고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퇴각하였고, 이 때 왜군이 며칠을 머무르면서 불태워버린 일이 있었으며, 그 후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군이 고창, 함평, 원평을 거쳐 노도와 같이 전주로 진격하여 풍남문에서 격전 끝에 관군을 물리치고 입성하여 마침내 일시적이나마 화약을 맺기도 한 의의가 큰 성문이다.

   풍남문 종각에서 파루를 쳐서 부성 안에 조석을 알렸던 종소리는 이제는 서울 보신각 종처럼 제야(1월1일 0시)에 종소리를 울려 이 고장의 새해 새 희망을 안겨주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