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 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로 이어 왔다. 그러나 역대 ㅣ뢍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비좁아졋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국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ㅔ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되넛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 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암양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경전은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 서. 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 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궁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아기도 풍부하게 전해 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현장인 차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들린다.
명정전은 임진뢔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 되었다. 명전전 주위에는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문정전, 독서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자리잡고 있다.
모든 궁궐의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든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르는데,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나쁜 기운이 궁궐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무지개 사이에는 도개비 얼굴을 새겼다. 앵두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활짝 피는 옥천교 주변의 봄 광경이 매우 화사하다.
조선새대에 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창경궁 홍화문 앞에서는 달랐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에게 직접물었고,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했다.
창경궁은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궁궐이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020세에 요절, 덕종으로 추존)의 둘째 아들로 작은 나버지인 예종의 위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13세로 나이가 어려 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 ,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 어머니인 예종 비 안순왕후 등 세 분 대비를 모시게 된 성종이 이들을 위해 마련한 궁궐이다.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은 내전의 중심 공간으로 규모가 크다. 전긱 옆에 돌 난간을 두른 내ㅔ모난 연지와 둥근 샘이 있으며, 뒤뜰에는 꽃계단이 마련되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희빈 장씨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가 사약을 받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통명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영역에는 대비,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여러 전각이 모여 있다.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정조는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아들 순조를 낳았고, 순조가 태어난 집복헌에서 순조의 돌잔치르 하였다.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창덕궁)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지금의 소춘당지)이다. 지금의 춘당지에는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내농포'라는 논이 있었다. 일제가 이를 파헤쳐 큰 연못을 만들었고, 1983년 이후에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춘당지이다. 춘당지는 서울 도시메 흔치 않은 넓은 연못으로, 주변의 숲도 울창하여 은 새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원앙도 춘당지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차경궁 건너편의 함춘원에 있던 수은묘(사도세자의 사당)를 경모궁으로 고쳐 잇고, 경모궁이 잘 보이는 궁궐 내 언덕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르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다. 통명전 뒤쪽 언덕이 자경전 터이다. 정조는 수시로 참배하였으며,경모궁으로 이도알 때 번거롭지 않도록 홍화문 북쪽에 암장을 헐고 월근문을 냈다. 누길을 끌지 않는 문이지만 조선 후기 '문예부흥'과 혁신 정치를 이끈 정조의 깊은 내면, 효심으로 생겨난 궁궐 공간이다.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건축의 뼈대는 목재와 철재로 이루어져 있고, 외피는 온통 유리로 덮여 있다. 당시 새로운 건축 재료였던 철과 유리로 지은 대온실의 외관은 대부분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인 궁궐 안에서 예나 지금이나 매우 이색적이다.
일제는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교온 것과 때를 맞추어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으며,마침내 1909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목적이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 데 있었음은 물론이다.
대온실은 일제의 불손한 의도 아래 훼손된 ㅈ창경궁의 일면을 모여주는 건축물이다. 하지만 건축된 지 이미 100여년이 지난 ㅗ늘날에는 그 자체가 역사적가치와 건축적 의미를 지닌 근대문화 유산의 의미르 가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대온실은 우리나라 천연 기념물, 야생화, 자생식물 등을 전시하는 공가느로 이용되고 있다. 자생화를 심어 가꾼 자생화단 과 더불어 궐내 자연학습장이 되고 있다.
'가족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08.18 서울 둘레길 1, 수락.불암산 코스를 가다 (0) | 2019.08.20 |
---|---|
19.04.13 형제들과 안산 둘레길을 가다 (0) | 2019.04.15 |
18.03.10 형제들과 서울 둘레길4 대모, 우면산 코스를 가다. (0) | 2018.03.12 |
17.11.04 우리 형제 자매들과 서울 둘레길 6 안양천 코스를 가다 (0) | 2017.11.05 |
17.04.23 형제들과 서울 둘레길 8코스 중 북한산 1코스를 가다 (0) | 2017.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