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야기

18.05.24 성지순례4, 삼성산 성지를 가다

소광선생 2018. 5. 24. 17:51

삼성산 성지





  • 미사 




미사 :  월례 : 매월 21일 오전 11시
           주일 : 오전 11시 (부활 제2주일  - 연중 제 34주일
가는 길 : 지하철 2호선 신림역 3번 출구  _ 버스 152, 5522번 삼성산 성지 하차
            2호선 서울대 입구역 3번 출구  -  버스 5412, 6515번 삼성산 성지 하차 
요약 테이블
위치 서울특별시 관악구 호암로 454-16 (신림동)

삼성산(三聖山)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때 새남터에서 서양인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교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아,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에 군문효수의 극형으로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이분들은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 했으며, 이국적인 외모를 감추기 위하여 상복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습니다.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조선땅에 흩어져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복음선포와 성사집천에 생을 ㅂ바쳤습니다. 특별히 모방 베드로 나 신부님은 당시 소년이엇던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 최방제 프란치스코 를 선발하여 마카오의 페낭 신학교에 유학을 보내 최초의 방인 사제로 양성함으로써 조선 천주교회에 큰 업적을 세웠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세 분 성직자는 교우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관가로 나아가  자수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라는 특별한 절차로 1839년 9월 21일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이때 앵베르 라우렌시오 범 주교님의 나이 43세, 모방 베드로 나 신부님, 샤스탕 야고보 정 신부님의 나이 37세였으며, 이들의 유해는 20여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잇다가 교우들의 노력으로 노고산(지금의 사깅데 뒷산)에 임시 매장되었고, 1843년에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58년 후 1901년에 박바오로의 아들 박순집베드로의 고증으로 조선8대 교구장 뮈텔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 성직자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학교를 거쳐 명동 대성당  지하 묘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으며, 1970년 봄, 오기선 신부에 의해 그동안 아무런 표시도 없이 방치되어오던 삼성산이 세 성직자의 매장지였던 곳으로 확인됨에 따라 같은 해 5월 12일 김수환스태파노 추기경,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및 박순집베드로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 비석을 세우고 추겅식을 가지면서 삼성산 안장터는 성지로서 최소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이었던 1984년, 성 바오로 요한 2세 교황 에 의해 세분이 시성되자 이를 기념하여 서울 대교구에서 묘지부근의 땅 52,800m2(1만 6천평을 매입, 1989영 명동 성당에서 성인 유해를 일부 옮겨 와 안치하고 축성식을 가졌다. 이후 관할 본당인 삼성산 겅당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며, 세분 성인을 기념하기 위한 월레미사가 이분들의 순교일인 21(9월 21일)로, 주일 미사는  부활 제2주일부터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 봉헌되고 있습니다.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루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이들은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 복음 전파에 힘 썼으며, 아울러 모방 신부는 당시 소년이었던 김대건 안드레아 ,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체스코 등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최초의 조선인 신부를 양성하였다.

한 배교자의 책략 때문에 앵베르 주교의 거처가 알려지자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구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인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세 성직자가 시성되자 이를 기념하여 1989년 명동성당에서 성인 유해를 일부 옮겨와 안치하고 봉헌식을 가졌다.